2017년 8월 20일 일요일, 맑음
어제 12시가 다 되서 잠든 꼬마들이 7시에 창문 너머로 들리는 성당종소리에 베개로 머리를 덮고 매트위에 뒹굴며 “할머니 미치겠어요. 저렇게 일어나라고 두드려 대면 사람들이 화 안내요?” 나도 시끄럽긴 했지만 별로 그런 생각은 안했는데… 그런 말에 뭐라고 대답하겠냐고 아범에게 물으니 ‘수백 년을 변함없이 쳐온 종이니 그러려니 하고 살겠다’는 대답. 예전에야 시계가 없던 시절, 멀리서 일 하다가도 종소리를 헤아려 보고 몇 시인가 알았으리라. 12시면 주부는 점심 준비를 하고, 오후에 여섯 점을 치면 ‘삼종기도’를 바치고 연장을 챙기며 일손을 접었으리라.
예전의 가난한 시절 시각마다, 반 시간마다, 15분마다 때를 알려주던 성당종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후손답게 이 정도의 소음엔 불평을 해서는 안 된다. ‘밀레의 만종’을 봐도 그 가난하고 힘든 생활에서 그들을 지탱해 주었던 게 바로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제 밤 아범과 어멈이 호텔로 떠나고 시아가 내게 하던 말, “할머니 오늘은 밤늦게까지 놀 거예요” “몇 시까지 놀 건데?” “11시까지 한번 놀아 보려구요” 스위스 애들은 보통 9시면 잠자리에 든다. “겨우 11시까지야? 우리 올나잇하자꾸나!”
그러나 주사위 게임을 하면서도 10시가 넘자 계속 하품을 하고 10시 반쯤 지나자 두 놈이 꾸벅꾸벅 졸다가 내가 1등으로 나자(어젯밤엔 꼴등) 노는 사람이나 구경하는 사람이나 너무 반겼다. 우리는 ‘타짜 집안’은 못 되나 보다.
두 놈이 이번에 와서 한 가장 큰 개인행사는 머리를 깎거나 파마를 하는 일이었다. 시아의 파마와 커트가 10만원을 훌쩍 넘어 들었다니 짠돌이 성시아가 큰돈을 썼고, 성시우는 준장 별 하나를 머리에 새겼다. 미사 후 가족사진이라도 찍자고 젤을 발라 멋지게 빗겨주고서 제발 머리 매무새 망치지 말라고 일렀다. 하지만 하무이가 돌아서자마자 우리 침대에서 엉아랑 레슬링을 하고 머리로 엉아 엉덩이를 밀어 엉망으로 헝클었다.
“시우야! 할머니가 뭐랬어?”라는 꾸중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할머니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깜빡했습니다”며 죽는 시늉을 한다. 걔의 연기에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자애들에게 예쁜 드레스와 곱게 빗은 머리에 리봉이라도 달아 주면 얼마나 오래 얼마나 뽐을 내며 정성스레 간수하던가!
온 가족이 빵고 신부가 집전하는 11시 미사를 드렸다. 2년 전만 해도 삼촌의 미사집전을 보고서 “삼촌이 하느님 하는 거야?” 묻던 시우가 그새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다. 주기도문에 성모송도 바치는 명실공히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내가 하느님을 만나 ‘안녕하세요?’ 라니까 나한테 뭐라고 하셨는데 기억이 안 난단 말이에요”라며 너스레를 떠는 장난꾸러기가 되었다. 미사 후 성당에서 삼촌신부와 가족 사진을 찍었다. 일곱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건 처음이다.
아이들의 종교 교육에 아범과 어멈이 지대한 공을 들였음이 한눈에 보인다. 일요일이면 가족이 함께 반드시 성당을 나가고, 집에서도 함께 기도하고, 식사 전 기도를 반드시 올리는 습관을 보인다. 저렇게 자라면서 삶에 흔적을 남기면 청년시절 교회와 좀 멀어지더라도 대개다 회심하는 경우를 보아왔다. 우리 친정집을 보더라도 역시 신앙은 여성에게서 간직되고 전해져 내려옴이 분명하다.
점심은 스파게티와 비프까스, 샐러드로 마련했다 식구들이 많으니 절로 밥맛이 난다.손주들과 작은아들과 꿈같은 이틀을 보냈다. 오후에 큰아들네가 제네바로 돌아가려는데 시우가 자기는 형아와 달리 개학을 안 했으니 할머니한테 남겠다고, 자기를 데리러 이번 금요일에 와 달란다. 우리야 손주와 꿈같은 한 주간을 더 보내니 좋고 작은손주는 함무이의 섭섭한 마음을 눈치채고 난생 처음 엄마와 떨어지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어린애답지 않게 정말 섬세하게 사람 맘을 살핀다.
저녁식사 후에도 산보하는 우리 주변을 무작정 달려다니는 한 생명체가 있어 이렇게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삼촌이 목욕을 시켜주고 나니까 벌써 잠들었고, 밤 11시가 넘어 큰아들네가 몽블랑을 넘어 다섯 시간 만에 제네바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