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배타주의의 역사, 그 ‘기원의 신화’에 대하여
배타주의로 인한 혐오스러운 역사와 가장 긴밀한 관련이 있는 종교라면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교⑴일 것이다. 서기 1세기 초부터 3세기 말까지 지중해 지역에서 문자를 전유한 소수집단의 지식권력이,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던 비문자 계층인 대중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추정하기는 어려워도, 빈민들의 천박하고 저속한 종교라는 낙인 아래 사회적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종교가 이렇게 극적인 반전의 주역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다.
그리스도교가 권력의 맛을 본 4세기 이후⑵ 성서나 그밖의 여러 문서들의 신학적 개념들은 누군가를 향한 적대감과 얽힌 배타주의적 언어로 속속 재해석되었고, 특히 위기 시에 그런 적대감의 언어는 대대적인 폭력의 불꽃을 일으켰다.
무수한 ‘이단들’이 발명되었고, 이웃종교들은 이교도(Paganus)⑶로 낙인찍혔으며, 이들에 대한 무차별 폭력과 학살, 재산몰수 등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그런 배타주의적 재해석이 오랜 제국종교의 역사를 거치면서 마치 ‘본래부터’ 그랬다는 ‘기원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그리스도교 신학계에서는 이러한 전환의 결정적 기점이 콘스탄티누스 로마황제의 밀라노 칙령(313년)이라는 점에서 그 전환을 ‘콘스탄티누스적 전환’(Constantinian shift)이라고 부른다. 즉 로마황제의 파트너가 된, 이른바 ‘정통파 그리스도교’가 탄생한 것이다.
4세기부터 본격화된 이러한 권력화된 그리스도교가 점차 그 위상을 확장하여 절정기에 이르게 된 때는, 세속권력의 하위파트너였던 관계를 전도시켜 최고 권력이 된 11,12세기다. 아무튼 ‘콘스탄티누스적 전환’을 표제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제국화에 대한 연구는, 레이건(Ronald Wilson Reagan)과 부시(George Herbert Walker Bush)가 집권하던 시대(1981~1993), 즉 그리스도교의 공격적 배타주의가 다시 준동하고 있을 무렵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 연구들이 주목한 것은 권력화된 그리스도교로의 전환이 ‘적대감의 종교’가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는 점이다.
이를 단순화하여 이야기하면, ‘콘스탄티누스적 전환’ 이전의 그리스도교에서 증오는 ‘왜’라는 물음과 결합되어 있었다. 예수나 바울에게서 드러나듯 그것은 자신들이 절박하게 체감하고 있는 폭력과 배제의 역사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저항의 산물이다.⑷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적 전환’ 이후의 그리스도교는 ‘왜’라고 묻는 대신 ‘누구’인지를 묻는다. 중요한 것은 이 ‘누구’에 대한 물음에는 자신들이 체감하는 역사에 대한 절절한 문제제기가 없다는 점이다. 언제나 ‘적그리스도’(anti-Christ)는 존재하며 각 시대마다 하수인을 만들어 낸다.⑸ 하여 신학자의 역할은 그것들을 색출하는 데 있다.
이러한 색출은 정통파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권력과 부를 배가시켰다. 왜냐면 그것은 특정 집단을 이단 혹은 이교도로 낙인찍을 수 있는 권력이 공증되었고 그렇게 낙인찍힌 집단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강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정통파 그리스도교의 신학은 이단심판관이 주도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신학에는 역사는 없고 시공을 초월하는 증오, 그리고 그 증오의 시대적 번안 행위만 가득하다.
이렇게 ‘콘스탄티누스적 전환’ 이후의 정통파 그리스도교 신학, 그 배타주의적 증오로 채색된 신학 담론의 한 가운데에는 ‘유일신 신학’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뿌리를 같이 하는 인접종교인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도 배타주의적 증오의 신앙을 구성하는 중심 논리다.
이 세 종교의 신자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신이 처음부터 유일신이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이 종교 밖의 대다수 사람들도 이 종교들이 처음부터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세 종교의 공동 정전(the Canon)인 제1성서(구약성서)에는 유일신 신앙이 존재하지 않는다.⑹ 심지어는 그리스도교만의 정전인 제2성서에 반영된 신 이해도, 유일신론(mono-theism)이 아닌, 단일신론(heno-theism)⑺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제2성서의 모든 텍스트는 그리스어로 쓰였는데 이것은 다신론적 문화를 품은 언어다. 그리고 예수는 강한 단일신론이 발달한 팔레스티나 출신이다. 해서 그리스도 신앙은 강한 단일신론적 신앙으로 다신론적 문화를 배척할 때조차 두 요소가 착종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하느님은 아니지만 사람도 아닌 존재들, 곧 초월적인 존재들이 제2성서에도 무수히 등장한다. 심지어는 그 초월적 존재들 가운데는 하느님과 같은 편에 있는 초월적 존재들도 있는데, 그들 중 어떤 존재들은 일종의 하위신 같은 존재이고, 또 어떤 존재는 하느님과 동격이기도 하다. 이 동격신에 관한 서사는 단일신론적 서사와 모순을 일으키는 데, 훗날 삼위일체 담론은 이 모순을 해소하려는 하나의 시도였는데, 무수한 논란 속에 있다가 정치적 강제를 통해 도그마로 정착했다.
한편 유일신 사회처럼 보였던 중세나 그 직후의 유럽 사회도 단일신론을 넘어서 유일신론적 신학이 지배적이었지만 정작 대중의 신심은 다신교적이었다.⑻ 그리스도교에서 유일신 신앙이 대중의 신심으로 본격 자리잡은 것은 활판인쇄기술이 대중화되고 공교육이 제도화되기 시작한 17,18세기 이후다.
그런데 이때는 유럽 중심주의가 다른 세계를 타자화하던 제국주의 시대였다. 하나의 제국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그것을 실현할 능력이 겸비된 시대에 그 사회의 내면화된 신념인 유일신 신앙이 그 사회 대중의 생각을 지배했다. 하여 유일신 신앙은 제국주의적 타자화 담론의 중심논리였던 것이다.⑼
한국개신교의 배타주의의 역사, 지난 두 시대의 두 가지 양상에 대하여
유럽의 그리스도교는 20세기 초에 이르면 자신들이 자행해왔던 가학적 배타주의를 청산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유럽제국의 가을’에 도달해서야 성찰이 본격화된 것이다. 에큐메니컬 신학 운동이 가장 체계적이고 광범위하게 전개된 성찰 현상의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가학적 배타주의는 새로운 제국 미국에서 다시 왕성하게 부활한다. 유럽제국이 유일종교사회를 지배담론으로 추구하던 시절에 종교적 배타주의는 그 폭력성의 잔인한 불꽃을 휘날렸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국교 거부를 입법화했다.
즉 법률상 미국은 유일종교사회이기를 포기했다. 그러나 일본의 종교학자 모리 고이치(森孝一)는 헌법과는 달리 미국사회를 추동하는 사실상의 국교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가 미국의 ‘보이지 않는 국교’(invisible national religion)라고 명명한 사실상의 국교는 바로 ‘개신교’였다.⑽
그런데 20세기 역사에서 미국적 개신교의 배타주의적 폭력성이 가장 잔혹하게 발현된 곳은, 미국이 아니라, 바로 한국이었다. 한국은 미국발 개신교 중 가장 원초적인 배타주의적 언어로 무장한 근본주의적 개신교의 세례를 받은 대표적 나라다.
서북지역(평안도와 황해도)의 장로교는 20세기 초 이후 한반도 전체에서 가장 성공한 개신교 종파였다. 여러 자료들에 기초해서 보면 해방 직후 북한의 개신교 신자수는 20~30만 명에 달했고, 남한은 1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북한 지역에서 서북지역의 장로교 신자는 북한 전체 신자수의 75%에 달한다.⑾ 그러니까 최소 수치로 계산해도 서북지역 장로교 신자 수는 남한 개신교 신자 전체보다 1.5배나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지할 것은 서북의 장로교는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성의 근본주의적 그리스도교였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 북한 지역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한 뒤 개신교도들은 공산당으로부터 가혹한 정치탄압을 받았고, 이것은 이들의 대대적인 월남 현상으로 이어졌다. 북한 개신교 신자 중 무려 35~40%가 월남을 선택했는데 그들 중 절대다수는 혈기 왕성한 남성 청년층이었다.⑿ 요컨대 남한 개신교 신자와 거의 맞먹을 만큼 많은, 주로 젊은 남자들이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심에 불탄 얼굴로 남한으로 몰려온 것이다.
당시 미군정 당국이 조사한 남한 지역의 이념 성향은 전체의 77%가 좌편향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런 좌편향 사회에서 미군정 당국은 남한을 기독교 반공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이때 미군정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는 개신교 세력이었다.
그들은 남한 사회에서 가장 친미적이고 극우적 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서북 출신의 장로교 신자들은 죽음을 불사할 만큼 열렬한 적극적 협력자였다. 그리고 개신교도들의 활약에 힘입어 남한은 빠르게 극단적인 우편향 사회로 변모했다.
이러한 극단적 변모의 시기인 1945~1960년에 한국의 주류파 개신교는 20세기 최악의 배타주의적 종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⒀ 이미 잘 알려진 두 개의 사건에서 그것은 여실히 드러난다.
1947년 제주에서 민간인 1만 명 이상이 학살된 ‘4.3사건’과, 피카소가 그린 〈한국의 대학살〉(Massacre en Coréee)의 배경인 1950년 황해도에서 3만5천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신천대학살 사건이 그것이다. 4.3 사건의 주요 학살자는 이승만 정권으로 알려져 있고, 신천대학살은 미군이 주범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두 사건에서 서북청년단 또한 잔인한 학살자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⒁
한편 1960년대 이후 개신교는 전혀 새로운 얼굴로 한국사회와 얽힌다. 우선 정치적인 소란스러움은 놀라울 만큼 지양되었다. 물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지만 그 진폭이 개신교만큼 큰 종교는 없었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개신교는 너무나 시끄러운 종교로 나타났다.
1960~1990년에 한국개신교의 교세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초고속으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이 성장을 특징짓는 것은 빌리 그레이엄 식의 부흥회와 조용기 식의 부흥회였다. 전자는 광장에서 소란스럽게 진행된 대규모 전도집회를 의미하며 후자는 기도원 혹은 기도원화한 교회에서 벌어진 발광적인 영성집회를 뜻한다.
군사정권 아래서 집회․결사에 대한 통제가 강력하게 실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개신교의 이러한 소란스러움은 이 종파의 특권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사람들의 일상적 생각에는 개신교가 정부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정부보다도 더 강한 존재인 미국으로부터도 특별한 수혜를 받는 종교로 여겨졌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이러한 특권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문화적인 소란스러움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포착된다. 시장에서 이른바 ‘미제’가 우대되고, 대중가요에서도 미군 전속가수가 더 우대되던 시절, 가장 미국적인 종교인 개신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다가갔다.
시각을 자극하는 크리스마스트리나 청각에 호소하는 통기타와 싱얼롱으로 표상되는 포크음악 스타일의 복음성가는 교회 밖을 향하여 과시적으로 전시되었다. 이 특권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풍요로운 나라, 신의 축복으로 가득한 나라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특권에 참여함을 의미했다. 특히 많은 청년들은 그렇게 교회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힘겨운 싸움을 할 필요도 사라졌고 사회문화적으로 호의와 선망의 시선이 눈에 띄게 확산되었다면 것은 지난 시대와 같은 개신교의 적대감은 과연 사라졌을까? 안타깝게도 ‘콘스탄티누스적 전환’으로 종교의 속성이 되어버린 ‘증오의 신앙’을 한국의 개신교는 전혀 청산하지 못했다.
유럽 제국들의 몰락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제국종교에 대한 청산을 본격화했던 유럽의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한국의 개신교는 여전히 제국종교를 선망했고, 그것은 포스트식민지 시대의 새로운 식민지성의 발현이기도 했다.
공산주의라는 정치적인 적그리스도에 대한 증오심은 여전히 신자들의 영혼 속에 깊게 새겨 있었지만 정부가 복수를 대행하고 있으니 교회는 세속정치에 관여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신앙은 다른 ‘적’을 필요로 했다. 이때 포착된 새로운 적은 이단과 이교 같은 종교적 범주에서 발견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이단이나 이교는 ‘전근대’로 표상되는 전통종교들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정통파 그리스도교 세력에 의해 이단으로 지목된 집단들은 대부분 전통종교적 요소와 혼합주의적 성격을 지닌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리고 대표적인 전통종교들인 불교나 유교, 무속 등도 바로 새로운 적으로 지목되었다.
물론 개신교는 조선에 유입된 이래 줄곧 전통종교들을 적대적으로 대했지만, 사회 전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단과 이교에 대한 근대화론적 청산논리를 유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개신교 신자들은 물론이고, 전 사회적으로 전통종교는 근대화를 지체시키는 낡은 종교라는 상식이 널리 퍼졌고, 개신교회는 미국적 이상이 한국에 실현되는 교두보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기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 ‘미국적 이상’이라는 것을 한국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로 번안해 썼는데, 1950년대 초부터 간헐적으로 등장하다가 그 십년대의 말에 널리 사용된 이 용어의 개념화를 주도한 이들은 주로 개신교 지식인들이었다.⒂
이 미국적 이상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 속에는 미국인이 누리는 자유에 대한 선망이 담겨 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미국인이 누리는 권리와 풍요에 대한 선망이다. 한데 또한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것은 선망하는 것이지 아직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실은 권리와 풍요가 제약되어 있다. 하나는 북한 공산주의자와의 싸움을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궁핍을 초래한 구습으로서의 전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박정희는 이 현실로서의 자유민주주의의 반공주의적이고 반전통주의적인 성장 지상주의, 그것을 위한 권리의 제약을 함축한 민주주의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불렀다.
그런 점에서 개신교 지식인들이 개념화한 자유민주주의에는 미국에 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함의(16)와 이승만-박정희를 잇는 권위주의, 그리고 박정희의 성장 지상주의를 한데 묶는 이념적 지향이 숨어 있다. 이것은 한국의 정통파 개신교의 친미적, 반전통주의적, 성장 지상주의적인 신앙이 야기하는 배타주의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그런데 이 시기 이러한 정통파 개신교의 흐름에 대한 저항도 비록 소수이지만 존재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개신교적 배타주의의 세 요소에 대응하여 세 가지 유형을 나타났다.
첫째는 공산주의자를 옹호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념적 상대를 적으로 보지 않는 방법으로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신앙운동이다. 둘째는 전통의 가치, 전통의 종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대화를 강조하는 신앙운동이다. 그리고 셋째 유형은 성장 지상주의가 낳은 사회적 격차, 그것으로 인한 빈곤층을 증언하고 옹호하는 신앙운동이다.
오늘의 한국개신교의 배타주의, 다시 전면전을 향한 망상
1960년경부터 시작된 맹렬한 성장세는 1990년 어간을 변곡점으로 하여 급속하게 꺾였다. 그리고 2005년의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1995~2004년 사이에 개신교는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올해 발표된 겔럽 조사(17)는 2014년의 개신교가 여전히 성장세에 있다고 보고 있지만, 15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이 표본조사의 결과는 오늘의 교회들이 체감하는 현실과 매우 다른 추정치였다.
2002~2008년 사이 폐업한 교회는 매년 1,300개가 넘는데, 그 수자는 이후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 각 교단 신학교에서는 신학생들의 취업난이 극심해졌고, 각 교단 선교국에서는 소속 교회들의 미자립 상황에 대한 보고서들이 잇따랐다.
또 최근에는, 이탈교인 문제가 아니라, 재적교인의 출석률 저하를 다루는 연구가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들이 규모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단 이러한 문제는 전체 교회의 1.7%로 추산되는 대형교회와 공유하는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대형교회에서 신자 감소 문제는 주목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대형교회는 규모 축소를 위한 분가(分家)를 단행했거나 선언했는데, 그것은 도리어 교세의 확장으로 귀결되었다. 하여 개신교 내에서 대형교회의 실제적 입지는 훨씬 더 강화되었다.
한데 오늘의 개신교가 겪고 있는 위기는 규모의 문제만이 아니다. 권위주의적 산업화시대의 세 주역인 군대, 재벌, 대형교회 가운데, 누구도 권위주의를 스스로 개혁하지는 않았지만 재벌은 건국 이래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반면, 군대와 교회는 시민사회로부터 청산 대상으로 낙인찍힌 대표적 범주가 되고 있다.
개신교에 대한 이러한 따가운 시선은 교회와 성직자들에 관한 숱한 추문을 공론화하게 했고, 이것은 개신교의 신망도를 더욱 낮게 했을 뿐 아니라 신자들의 자존성에 깊은 상처를 냈다.
이런 위기에 대해 개신교의 일각에서는 통렬한 성찰과 개혁을 모색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특히 많은 작은교회의 성직자나 평신도의 노력이 돋보인다. 과거 대성장 시대(1960~1990)에는 에큐메니컬 그룹에 속하는 일부 교단에서만 성찰과 개혁의 시도들이 집중되었었다. 하지만 이제 작은교회와 평신도교회는 신학적으로 진보인지 보수인지와 무관하게 폭넓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사회에 비추인 교회의 모습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퇴행적인 모습이 두드러져 보인다. 실제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퇴행적 행동들이 연이어 들춰지고 있다. 성직자의 성추행사건, 공금 횡령과 배임 사건, 심지어는 돈세탁 사건 등이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게다가 정부나 지자체 장들의 성시화 선언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벌이는 장로대통령 만들기 운동, 명분 없는 기독정당 만들기 운동 등으로 나타난 질 낮은 정치세력화, 그리고 아프간 피랍사태로 크게 주목받은 문제적인 해외선교 열풍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개신교 신자들을 재결속시키고 실추된 자존성을 높이는 데 일정한 효과를 나타내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서 그 부작용으로 더욱 위기를 깊게 하였다.
그런데 또 다른 퇴행적 행보가 점점 두드러지고 있다. 내가 보기엔 이것은 가장 치명적인 퇴행성에 속한다. 앞 절에서 이야기한 ‘증오의 종교’로서의 성격이 빠르게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출현은 이러한 배타주의적 경향 강화의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18)
이 단체의 예산 규모는 소수의 상근자와 사무실 임대료를 빼면 거의 아무 것도 못할 만큼 별 볼일 없다. 그럼에도 여기에 참여한 이들의 상징적 위상은 남한 개신교 전체를 다시 이념 프레임으로 재편하게 했다.
한기총의 상징적 위상이 불러일으킨 주된 효과는 무수한 미시동원체들(micro-mobilization actors)을 생성시키거나 재활성화(revivalization)되게 했다는 점이다. 이들 단체들은 미시적인 각 영역에서 이념적 적그리스도를 찾아내고 그들을 향한 공격을 아낌없이 퍼붓는다.
그런 점에서 이들 미시동원체들은 지난 1945~1960년 사이에 공격적 개신교도들이 벌인 전면전을 꿈꾸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망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서북청년단’이라는 이름을 다시 내걸은 단체의 태동이다.
단 이들의 주된 공격의 장이 사이버공간이라는 점이 과거 1940,50년대의 공격적 기독교 신자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아무튼 이 극우적 미시동원체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종북 마케팅의 자원이 되었다.
최근 이러한 개신교의 배타주의적 신앙은 이념 프레임을 넘어서 무슬림을 적으로 삼는 인종주의적 프레임(제노포비아)과 성소수자를 적으로 하는 이성애주의적 프레임(호모포비아)으로 지형을 확장시키고 있다. 또한 이웃종교에 대한 공격성을 강화시키고 있으며, 대중음악, 영화 등 대중문화 영역에서도 악마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개신교의 배타주의적 공격성은 이념 프레임을 축으로 하여 다방면으로 확산되고 있고 또 그 공격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한데 이 시도들이 사회적으로 실추된 개신교의 위상을 반전시키는 데는 거의 아무런 기여도 못하고 있다.
또한 위축된 교세를 다시 성장 기조로 전환시키는 데도 별다른 효과가 없다. 더욱이 상처 입은 신자들의 자존성을 회복하게도 못하고 있다. 다만 공격적 활동가 신자들을 활성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무수한 증오 담론의 유포자가 됨으로써 싸움을 부추기고 서로를 적대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7년과 2008년의 위기를 경유하면서 한국사회는 신자유주의의 폭력성이 가장 야만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하나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무한생존게임에 올인 하였다가 이제는 그 게임에서 탈락할 것이 두려워 절망적인 생존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거기에서 탈출할 계산 가능한 미래를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누구는 몰락했고, 누구는 몰락의 예감 속에 고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해서 사람들은 종교적 해방의 꿈을 꾼다. 혹자는 그런 고된 일상 속에서 신체나 정신이 병든 채 종교적 해방을 갈망한다.
그런데 구원의 종교임을 주장해온 개신교는 사람들의 갈망에 다가가는 종교가 되기는커녕 그런 상황에 놓인 이들의 마음속에 증오를 심고 있다. 하여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절망적 위기를 타자화된 적에 대한 증오의 행위에 몰입하게 한다.
고통당하는 이를 위로하고 죄인을 사면하며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에게 축복을 선포했던 예수, 그리고 그 예수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켜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을 실천하면서 신학적 체계의 틀을 놓았던 바울, 그들은 사회 속에 타자를 증오하게 하고 그러한 배제의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체제와 전쟁을 벌였다.
한데 배타주의적인 정통파 그리스도교는, 예수와 바울이 아니라, 그이들이 싸웠던 체제를 닮아가고 있고, 예수와 바울이 함께 하고자 했던 이들에게 증오의 영을 심어주고 있다. 최근의 한국개신교는 바로 이러한 콘스탄티누스적 전환의 길 한 가운데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한국개신교를 걱정하는 핵심 논점이다.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