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간 금요일 (2025.09.26) : 하까 1,15-2,9; 루카 9,18-22
순교자 성월도 거의 마쳐갑니다. 많은 본당이나 수도원에서는 9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순교자의 밤’을 지냅니다. 신자들이나 수도자들에게 순교 정신을 일깨우고 순교자들을 현양함으로써 순교 신심을 북돋우기 위한 신심행사입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쳐서 그리스도를 증거한 증인들입니다. 보편 가톨릭교회가 사도들을 주춧돌 삼아 세워졌다면, 한국 가톨릭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로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이 피흘린 곳마다 이들을 현양하는 성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전국의 수많은 순교 성지들은 여느 본당 못지 않게 순례자들로 연중 붐빕니다. 한국 교회의 새로운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성전을 주제로 하여 순교 현상을 총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까이 예언자를 시켜 폐허가 되어 버린 예루살렘에 새로운 성전을 지으라고 즈루빠벨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와 백성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하까 2,4-5). 그런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도 예고하셨지만(루카 9,22) 실제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루카 24,15).
우리 민족에게 하느님께서 오묘한 섭리로 전해 주신 그리스도 신앙은 어느 나라 교회와 비교해 보더라도 뚜렷이 구분되는 세 가지 은총에 힘입고 있습니다.
첫째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과 지성적인 구도정신으로 신앙이 전해졌다는 점입니다. 평신도들이 임시로 세운 교계제도가 발휘했던 놀라운 선교 위력은 북경 주교로 하여금 조선 천주교회가 이단으로 빠질까봐 염려할 지경이었고, 노론파 대신들이 정적이었던 남인 수재 선비들을 견제할 빌미로 박해를 시작할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둘째는 교우촌의 건설과 유지, 전승 과정에서 드러난 창의성입니다. 조상제사금지령으로 박해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양반 신자들이 떨어져 나갔지만 중인 이하 신분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신자들이 더욱 늘어났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고 남녀가 동등함을 가르친 천주교 교리의 복음적 매력 덕분이었습니다. 이렇듯 교우촌이 창의적으로 발휘한 복음적 매력 덕분에 백 년의 박해를 버티어낼 수 있었습니다.
셋째는 이 교우촌의 매력 덕분에 박해의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 행동도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박해와 순교는 이웃 나라들에서도 다 있었는데, 그 후손들이 해마다 순교자 성월을 정해 두고 순교 정신을 기리는 교회는 우리 교회가 유일합니다. 순교자들의 부활 현상입니다.
교회 창립 과정에서 드러난 평신도들의 자발성이나, 박해를 이겨내게 한 교우촌 현상에서 입증된 평신도들의 창의성 못지않게 중요한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순교 정신을 사도직 활동에서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동기는 부활에 대한 희망 때문이므로, 순교의 영성은 곧 부활의 영성입니다.
자발성과 지성적인 구도정신으로 신앙을 들여오고, 이 신앙 진리를 창의적으로 실천하고자 교우촌을 세웠으며,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바쳐 순교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선조들을 다른 나라 교회와 달리 2백 년이 넘어가도록 해마다 빠짐없이 기억함은 순전히 인간적인 노력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으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이끌어 주신 은총입니다. 이 부활 신앙으로, 신앙 선조들이 시작한 민족 복음화의 과업을 우리가 완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 신앙으로 세워질 무형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마치 무너진 성전처럼 우리 신자들 안에서 부활 신앙이 매우 취약합니다. 교리에서나 전례로서만 그치는 둣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 대한 믿음으로 사도직을 행하고, 부활 신앙으로 새로운 교우촌을 세우라고,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에게 부활 신앙으로 격려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