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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아들, 변절자의 삶을 선택하다
  • 장유정
  • 등록 2017-08-25 17:41:26
  • 수정 2017-08-28 15: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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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이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 (사진출처=MBC 다큐 ‘안중근 105년, 끝나지 않은 전쟁’ 갈무리)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이는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와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현장에서 체포됐다. 보통의 어머니라면 옥중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조마리아 여사는 보통의 어머니와는 달랐다. “의로운 일을 했으니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의롭게 죽으라”는 말을 전하며 말 그대로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안중근 의사에게는 ‘호부견자(虎父犬子)’, ‘아비는 호랑이인데 새끼는 개라는 표현 역시 따라붙는다. 아버지는 훌륭하나 아들은 그렇지 못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민족의 영웅인 그와 그의 차남인 안준생을 함께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왜 영웅의 아들을 개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안준생은 아버지의 모습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기도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안중근 의사는 안준생이 2살 될 무렵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영웅의 삶을 살다 갔지만 아들의 기억 속에는 그런 아버지의 잔상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안 의사의 가족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점점 더 심해져 평생을 숨어살고 쫓겨 다녀야만 했다. 장남인 안분도는 7살 무렵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독살 당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자식들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이 컸을까 원망하는 마음이 더 컸을까. 아버지에 대한 안준생의 마음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안준생은 안중근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제에 탄압받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일제에 굴복하게 된다. 1939년 10월 15일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서울의 장충단 터에 세워진 ‘박문사(博文寺)’에서 이토의 영전에 향을 피우고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 정성을 다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이토의 아들인 이토 분키치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사죄한다. 이렇게 안준생은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동원되었으며, 안중근을 영웅으로 여기던 조선인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는 그렇게 민족의 ‘변절자’, ‘친일파’가 되었다.


우리 민족에게 수치와 같은 인물인 안준생.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의 시각에서 아버지 안중근을, 그리고 그 시대를 바라본 작품이 있다.


▲ 연극 ‘나는 너다’ 속 안준생의 모습과 그를 힐난하는 할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모습이 교차되어 보인다. (사진출처: 동아닷컴 블로그)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 되던 해인 2010년, 연극 ‘나는 너다’의 막이 올랐다. 


독립 운동가이자 민족의 영웅인 아버지와 그를 부정하고 ‘친일파’, ‘변절자’라는 오명을 평생 안고 살다간 아들의 이야기.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 안중근과 그의 차남 안중생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기억하고 배우는데 급급했지만 연극 ‘나는 너다’는 아버지인 안중근과 아들 안준생의 이야기를 내세워 둘의 대비되는 삶을 그린 신선한 작품이다. 


초연 이후 2014년,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년을 기념해 재 공연을 하기도 했다. 두 번의 공연 모두 배우 송일국 씨가 안중근, 준생의 1인2역을 맡아 열연했다. 인상적인 것은 극중에서 안중근을 의사(義士)가 아닌 장군(將軍)으로 칭했다는 점이다. 극 중 안중근이 만국공법에 의거해 일본인 포로를 평화적으로 석방한 사건으로 인해 독립군 동지들과 대립 하는 장면에서는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대장”이라 강조하며 대의와 도덕을 중시하는 장군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반대로 아들 준생의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자면 준생이 거지꼴을 하고 무대 중앙에 주저앉아 자기 자신과 아버지, 그 시대를 향해 독백하는 장면이다. 자신을 힐난하는 군중에 둘러싸여 친일행각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합리화하려는 자신 사이에서 수많은 고뇌와 고통을 느끼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극 중에서 안중근과 준생의 묘사는 극명하게 대비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극적인 대비를 장치로 사용해 치욕의 역사를 대신 반성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안중근이라는 인물은 교과서 속 근대사의 빼놓을 수 없는 위인이다. 정작 우리는 그의 업적에 대해서만 배울 뿐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쉽게 접할 수 없다. 특히 우리의 교과서는 ‘영웅의 아들’을 ‘변절자’로 가르치는 것 자체를 치욕이라 여겼는지 안준생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연극 ‘나는 너다’는 그 치욕의 역사를 과감하게 끄집어내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영웅의 자식이라고 해서 반드시 영웅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는 그저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선택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을 옹호할 수 없다. 그의 행위는 명백한 친일행위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말은 친일파들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위해 만들어낸 대표적인 궤변일 뿐이다.


안중근과 안준생. 둘의 생애는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민족의 영웅인 아버지의 아들이 민족의 변절자가 된 이 부자관계는 오히려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지금까지 안준생의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아도 쉬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는 이 치욕의 역사 한 편을 끄집어내어 반성하고 우리는 역사에 비추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 안준생(安俊生. 1907-1952)


안중근의 차남으로 안중근 의사가 중국에서 활동할 무렵 태어났다. 임시정부 보호 아래 상해에서 성장해 약국을 운영하여 생계를 이어갔으며 정옥녀(鄭玉女)와 결혼해 슬하에 2녀 1남을 두었다. 중일전쟁 당시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피난하는 과정에서 안준생의 모친과 가족들만이 상해에 남게 되었다. 그 이후 대표적인 친일조선인인 이갑영을 단장으로 한 ‘재상하이유지만선시찰단(在上海有志滿鮮視察團)’의 일원이 되어 서울을 방문했고, 이 때 박문사(博文寺)를 참배하여 김구 등 많은 조선인의 분노를 샀다. 광복 후 떳떳이 조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그는 1950년 조용히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피난지 부산에서 신병(身病)이 악화되어 생을 마감한다.




안중근 평화기자단 - 장유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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