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0일 수요일, 맑음
먹고 노는 것도 일이다. 매일 사람을 새로 만나고 함께 먹고 얘기를 나누고 웃다 돌아오면 휴천재 텃밭 돌보는 일보다 더 피곤하다. 그러니 놀자 해도 저력이 있어야 논다. 그래서 디스코텍은 20세 전후의 청년들만 입장이 가능하단다. 잔카를로 신부님 여동생 요안나 아줌마가 디스코텍 앞에서 친구 둘과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디스코텍의 기도가 심심했는지 말을 걸더란다. “할마시들, 이 앞에서 뭐하고 있노?” “디스코텍 문 열기 기다린다, 왜?” 깜짝 놀란 기도의 얼굴표정을 보고서 78세, 81세, 83세 세 할메들은 엄청 웃었단다. 하기야 그 나이라면 신나게 춤을 추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달리 한다 해도 별로 나쁠 일도 아니다.
오늘이 우리 ‘한국 순교성인 축일’이어서 산타르치시오 공동체 전체가 미사를 올려 주셨다. 루이지 신부님이 집전을 하셨는데 우리 교회가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신부도 없이 공부를 시작하며 북경에서 신부님을 모셔온 일, 백년 넘는 박해를 거치며 죽음으로 신앙을 지켜낸 놀라운 교회라고 설명하셨다. 그 교회를 대표하여 전직 한국대사님 부부도 이 자리에 계시니 축하할 일이라며 신학생들에게 말씀해 주신다.
루이지 신부님은 나이 91세로 목이 많이 굽어 불편하실 텐데도 늘 맑은 미소로 손에서 묵주를 놓는 일이 없다. 놓는 순간엔 손에 책이 들려있다. 네모 진 내정 난간에서 영적 독서를 하고 계시는 모습에선 거룩하게 살아온 사제의 향기가 진하다. 로마관구 관구장을 하셨고 최고평의원도 지낸 분인데 이제는 젊은 수련자들과 살면서 저 젊은이들이 나이든 후 자기 모습을 그려보게 만드는 모범답안이다.
9시 30분 보스코를 아우구스티니아눔에 ‘등교시키고’ 나는 곧장 오스티아 카르멜라한테 갔다. 80년대에 같은 아파트 2층과 4층에 살면서 아침에 애들 학교 보내 놓고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점심, 시장보기, 요리하기 등 거의 붙어살기를 5년! 내가 떠나자 자기 반쪽을 떼어낸 듯 통곡을 했었다. 하기야 헤어지고 1년 안에 바로 위의 오빠, 큰오빠, 아버지까지 모두 세상을 떠나 딱 혼자 남았다. 자매가 없어 늘 나를 ‘입양한 여동생’이라 불렀는데 나보다 두 살 많기 때문이다.
이번에 와서도 늘 바쁜 나를 원망하면서 매일 전화를 해와 오늘은 맘먹고 그니를 찾아갔다. 병원에 함께 가서 심전도 검사를 하고, 시장을 함께 보고, 내가 바다가 보고 싶다니까 바람찬 오스티아 앞바다(지중해)에서 덜덜 떨면서도 좋아했다.
둘이서 돌아와 파스타와 줄기콩, 로스트비프를 함께 만들어 먹었다. 예전처럼 좁은 부엌에서 끼어 앉아 먹으니 더 좋았다. “술란, 네가 앉은 그 자리는 옛날 빵고 자리기도 했어. 저녁에 한국음식이 짜고 매워서 먹기 싫다며 4층으로 올라와 그 자리에 떠억 버티고 앉아 ‘이모, 나도 여기서 밥먹어도 되죠?’라고 묻곤 했지. 그때가 그리워”
실상 빵고는 그 집 둘째 시모네랑 잘도 놀고 잘도 싸웠다. 한번은 둘이 싸우는 걸 몰래 지켜보니까, 시모네가 3유로 빵고가 2유로 돈을 모아 친구한테서 포르노 잡지를 건네받았나 본데, 시모네는 자기가 돈을 더 많이 냈으니까 자기 꺼라 우기고, 빵고는 2유로어치를 찢어달라고 싸우다 들통이 난 터였단다. 시모네가 우리집에 놀러오면 “빵고, 빨리 똥싸!”가 빵고를 불러내는 인사였다. 그 시모네가 마흔두 살의 세무경찰이고 일곱 살짜리 딸 쥴리아의 아빠다.
4시에 바티칸에 가서 ‘학교를 파한’ 보스코를 싣고 로마의 중심가 트라스테베레로 돌아오는데 정말 로마사람들 운전 솜씨는 예술의 경지다. 차선이 없는 길을 언제는 두 대가, 어느 때는 서너 대가 서로 머리를 디밀고 1, 2센티 간발의 차로 비켜가며 충돌을 피한다. 물론 크고 작은 생채기로 말짱한 차를 보기가 힘들다. 재작년 함께 왔던 친구도 운전 한 가닥 하는데, 여기서는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해서 내가 핸들을 잡았었다. 나야 1980년 막 면허를 따고 로마에 와서 앞뒤로 박고 박히며 운전을 익혔으니까…
산칼리스토카타콤바에서 바티칸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