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22일 금요일, 맑음
어제 밤늦게 돌아와 일기를 쓰고 나니 새벽 두시. 정대사님이 말로는, 일본에서는 10년 동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많고, 따라서 10년 동안 쓰는 일기장을 문방구에서 판단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은, ‘10년 일기 쓰는 그런 사람들은 천성이 독종이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시쳇말을 하더란다.
나도 ‘오늘 하루쯤 빼먹고 싶다’는 맘이 굴뚝같지만 한번 그러다 보면 빼먹는 일이 다반사가 될 것 같아서 여태 그러질 못했다. 이젠 9년차에 들어섰으니, 시간만 지나면 머지않아 10년을 채울 거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면 뭘 할까를 궁리 중이다.
새벽 미사에 갔다. 한창 왕성한 청년들이 가득한 성당에는 그들에게서 풍기는 기운으로 생기가 넘친다. 보통 청년들은 거의 야행성이니 아직도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기도 하지만 자발적으로 저렇게 꼭두새벽에 일어나 ‘예불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까 하여 기특하기만 하다.
이곳 살레시오 수도원 타르치시오(San Tarcisio)는 학생수사들이 31명, 어른수도자가 12명, 거기에 우리 둘까지 하면 식구가 45명이다. 정말 식당엘 가면 왜 가족을 ‘식구(食口)’라 부르는지 실감난다. 미사가 끝나면 우리 어른들은 20분 정도 먼저 와서 식사를 하고 연학기 수사들은 그 동안 ‘영적독서’를 하고 온다. 우리 늙은이들이 먼저 와 먼저 먹어서 망정이지 그들이 들어서는 순간, 마치 아프리카 흰개미떼가 나무 그루터기 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버리듯,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식탁의 모든 게 동나버린다.
보스코가 아우구스티니아눔 도서관에 가는 마지막 날. 그를 학교에 내려주고 나는 오스티아로 향했다. 이번 여름 산에서 오래 지내다 로마에서 지낼 시간이 짧아 오랫동안 함께 보내지 못한 친구 카르멜라의 마음을 다독여줘야 한다.
그니에게 가는 길에 ‘오스티아 안티카(Ostia Antica)에 잠시 들렸다. 예전, 오스티아에 살적에는 우리에게 손님이 올 때마다 함께 가던 유적지다. 화산재로 사라진 도시경관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폼페이도 자주 갔지만, 우선 가깝고, 전쟁이나 지진으로 파괴된 일 없이 역병이 돌면서 주민들이 떠나자 그냥 갈대밭으로 변하여 3천년 가까운 삶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도시입구에 공동묘지, 냉탕 온탕 증기탕이 있던 해신 넵투노 목욕탕, 그 옆에 선술집, 20여명이 나란히 앉아 변을 볼 수 있는 공중화장실(수세식!), 아침마다 신선한 빵을 구워 팔던 빵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주간마다 공연이 있던 반원극장, 신전, 입법사법행정부가 중심부에 자리하고 주변엔 지금 우리가 사는 아파트 서민주택(그들은 ‘인술라(insula)’ 곧 섬이라고 불렀다)의 시조가 되는 공동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저 신전에서는 옛 적에 바오로딸 정아우실리아 수녀님(최근까지 관구장을 지내셨다)과 함께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새롭다.
혼자 한 시간 반을 걷는데 18세 이하는 무료이기 때문인지 많은 청소년들이 관람중이고, 미술학교학생들은 데쌍을 하고 있다. 65세 이상 어른도 한 푼도 깎아주지 않고 8유로를 꼬박 받는다. 옛날을 추억하며 일순간에 사라져버린 젊음을 곱씹으며 3천년 가까운 도읍을 거닐었다.
내가 폴렌타(옥수수죽)가 먹고 싶다 했더니 카르멜라가 함께 준비하잔다. 저 남쪽 끝 칼라브리아가 고향이고 손맛이 남달라 그니가 장만하는 음식은 다 맛이 있다. 식사 후 보스코를 픽업한다는 핑계로 좀 일찍 일어서니 많이 서운했던지 그니 눈에 눈물이 글썽하다. 얼마 전 부인 소피아를 앞세웠다는 수위 아저씨 죠반니를 보러 갔다.
저 아파트 4층(5)이 카르멜라네집, 2층(3)이 우리집이었다
이웃에 사는 딸 안나가 96세의 아버지를 돌봐드리고 있다. 이곳 자녀들의 효성심은 동방예의지국을 자랑하는 우리를 훨씬 능가한다. 예전에 우리 빵기 빵고를 너무 예뻐하셔서 지금도 그 애들의 버릇을 기억 하며 하나하나를 짚어가셨다.
4시 보스코랑 함께 돌아와 쉬다가 해넘이 카타콤바 언덕과 치프러스길을 로사리오로 누비니 천국이 따로 없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다. 그리고 천국이어서 우리는 이곳을 두고 떠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