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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누구나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수도원
  • 전순란
  • 등록 2017-09-27 11:10:14
  • 수정 2017-09-27 1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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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5일 월요일, 맑음




내일 여행길에 오르면 언제 빨래를 할 수 있을까 싶어 빨래터에 다시 갔다. 세탁기가 세 대, 빨래걸이가 다섯 개, 다리미대가 셋. 그런데 남자만 40여 명이 빨래를 해 입고 살아야 하니 언제나 북적거리고, 차례가 와도 세탁기 중 성한 건 사실상 하나뿐이니 부지런해야 옷에 때깔이라도 난다. 세탁기 중 맨 왼쪽 게 그나마 세탁이 잘된다는 소문.


그래서 줄을 서고 있는데 신학생 하나가 그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는 한참이나 누구에게선가 전화로 사용설명을 듣는다. 엄만가 보다. 옆에서 기다리던 친구가 물비누와 섬유린스를 넣기에 몇 분이나 돌리느냐니까 15분만 돌리겠단다. 물에 적셨다 꺼내도 15분은 걸리는데… 안 되겠다 싶어 빨래를 넣고 무게를 스스로 재보고서 탈수만 설정하고 시간을 55분에 맞추라니까 서툴지만 차분히 따라한다. 우리 보스코 수준이다. 아니 보스코는 여태까지 한 번도 세탁기를 돌려본 적이 없다. 


세탁실에 가면 다리미질하는 학생, 뭔가 꿰매는 학생 등, 난생 처음 하는 일이라 어설프지만 안쓰럽고도 대견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 저런 청년들을 키워내서 어디서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살레시오 양성 교육이 대단하다.


내일 1박 2일로 피정을 떠나기 전, 오늘은 젊은 수사들 전부가 산타르치시오 구내 화단을 정리하고, 화분들에 담긴 선인장들을 한데 모아 심고, 바깥마당의 나무를 전기톱으로 이발하고, 잔디밭을 다듬는데 하루 종일 고생들 한다. 몇몇 신학생 수사들에게 말을 걸어보니 자기가 수도원에 와서 하는 일을 부모에게 들려주면 ‘생전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더니 꼬숩다’는 엄마들이 대부분이란다. 커다란 화산석 돌을 옮기며 힘깨나 쓰던 학생은 ‘이건 아무것도 아녜요. 집에서는 더 심한 일을 했다구요’라고도 한다. 슬로베니아 출신 꺽다리 수사는 자기나라 국가대표 농구선수였단다. 우리 조상들이 ‘도둑질 빼고는 다 배워두라’고 했던 말도 까닭이 있다.


11시에 빵고네 대학 UPS엘 갔다. 보스코는, 몸이 불편하여 양호실에 계시는 브라키 교수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말씀을 나누었다. 그동안 나는 빵고랑 엊그제 생일을 맞은 시우에게 줄 선물을 사러 갔다. 전에는 매사에 자그마한 소형 슈퍼로 장사하던 이탈리아인들도 어느 새 초대형 몰을 만들어야 손님을 끄는지, 공룡처럼 커져만 가는 시장이 되레 두렵기만 하다.




오늘도 파킹장에 차를 세우고 매장엘 들어갔는데 빵고 말은,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이니까 유리창 깰 걱정은 말라’고 날 안심시키지만 한번 믿음이 떠난 실망은 두려움을 낳는다. 이태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좀처럼 없었다는 내 말에 지중해 건너 난민이 들어와서 나라가 이 꼴이라는 게 이탈리아인 친구들의 변명 같은 대답이지만 과연 그럴까도 믿기지 않는다. 난민이 없던 시절에도 데시카 감독의 영화처럼 ‘자전거 도둑’은 있지 않았던가? 오늘의 독일 총선도 난민에 대한 두려움과 배타 정신이 메르켈 정권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점심은 교구신부님 한 분, 이번에 공부를 시작하는 박성재 신부님과 함께 다섯 식구가 함께 먹었다. 만만한 게 중국식이어서 가까운 중국식당엘 갔다. 옛날에 우리 가난하던 유학시절 하얀 쌀밥과 짜짜이(짱아찌)한 접시로 여행 중 우리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80년대와는 격세지감이 있는 요즘이어서 유학생들은 음식의 절절함을 그때만큼 모를 꺼다.



5시에 캐나다에서 공부를 하러 로마로 유학 온 구신부님이 베로나에서 내려와 짐을 풀고서 카타콤바로 우릴 찾아 왔다. 한국에서 문영석 교수님이 소개해 주신 사람인데 이곳까지 와서 만나다니 이 또한 큰 인연이다. 함께 찾아온 여동생 마리아처럼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공부를 한단다. 오누이 둘 다 좋은 직장을 다니다 사제가 되었고 공부하겠다는 뜻 하나로 이곳에 왔으니 대단들 하다.


산타르치시오 공동체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라 생과자를 사다 이런저런 공동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나이 드신 신부님들은 우리의 작별을 무척 아쉬워하고 쟌카를로 신부님은 더 외로워 보인다. 2년후 다시 오겠다니까 경리신부님이 ‘당신들이 다시 온다면 여기 사는 사람들 다 내보내 방을 비우고서라도 맞아줄 테니 꼭 오시라’는 대답을 들려주니 우리가 어지간히 사랑을 받으며 지낸 듯하다. 이 수도회의 특징은 누구나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만드는 데 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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