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24일 화요일, 맑음
빵기가 외교부 직원과 10시에 미팅이 있다고 서두른다. 시아 시우가 읽을 책 20킬로짜리 두 박스를 덕성여대 구내우체국 우편물 취급자에게 맡기고, 빵기를 싣고서 수유역까지 달려갔다. 9시10분이니 광화문 외교부까지 겨우 시간에 도착하겠다.
내 곁의 친구들이 나더러 ‘바쁜 사람 옆에 있으면 덩달아 바빠져 자기들 모두가 과로사하겠다’며 제발 좀 자중하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는데, 나보다 더 분주한 빵기가 와서 동서남북으로 뛰다 보니 걔가 미처 못 한 나머지 일만을 하는데도 이렇게 힘드니... 다른 사람 사정도 살펴야겠다.
우체국으로 돌아오니 아저씨는 우리가 가져간 박스 겉면에 바코드 따위가 물건을 나르는데 지장을 준다고 새 박스를 사서 보내란다. 헌책 두 박스를 보내는 선편 송료만도 15만원! 내용상으로 제대로 된 책인지도 모르겠지만, 빵기 빵고가 꼭 시아 시우 나이었을 때, 나도 둘에게 책을 많이도 읽혔다. 빵기도 내가 했듯이, 애들 한국어 공부와 이야기책과 역사 사회책을 준비해가서 읽히는 중이다. 멀리 스위스에 살면서도 한국인 정체성을 심어주려는 노력이 기특하다.
우체국 아저씨는 박스가 무거워 힘들다며 포장과 부치기를 다 해줬다. 함양 유림 우체국 아저씨들도 그랬지만 이곳 우체국아저씨도 무척 친절하고 성실하다. 내가 보기엔 '대한민국 공무원 중에 최고의 공무원은 우체국 직원’이라는 생각이 늘 든다.
보스코에게 ‘정암학당’에서 11월에 강의를 부탁한 김주일, 김진식 두 박사님들이 그를 직접 만나러 왔다. 어제만 해도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점심을 먹겠다는 투여서 보스코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아침에 나더러 점심을 파스타로 준비하란다. 그때야 그답다 싶어 기분이 좋았다.
전식은 이태리에서 얼려왔던 멸치젓피자. 방울도마도를 사와서 스파게티를 했다. 뒤이어 살라미와 모차렐라 치즈를 넣은 샐러드를 통밀빵과 함께 냈다. 푸딩과 과일, 커피와 초콜릿으로 마감을 했다. 오랜만에 집에서 하는 손님 대접으로 몸을 풀었더니만, 저녁에 송목사가 친구들과 함께 온단다. 때 되서 오는데 그냥 보내는 게 안 되서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빵기가 10년 넘게 신은 구두 뒷굽을 고쳐달라고 롯데백화점에 맡겼다며 나더러 찾아다 달란다. 오후 4시에는 아래층 화장실에 비데를 달러 기사가 오고... 보스코는 마지막 교정을 본 아우구스티누스의 ‘독백’(Soliloquia)이라는 저서 교정원고를 갖고 장충동으로 갔다. 그의 옛날 친구 정학근 신부님이 분도출판사 사장이 된 터라 한번 만나 저녁이나 들겠다며 나간 길이다. 모든 일이 한꺼번에 쏟아질 때면 나는 박진감 넘치는 게임을 하듯 해낸다. 우리 두 아들은 마지막까지 일을 미루다 남은 시각에 기차게 해내는데 이건 걔들의 습관 같다. 나는 미리서 다 해두어야 직성이 풀리고, 보스코는 시간에 맞추어 쉬엄쉬엄 해낸다.
저녁 7시. 송목사(우리집 제1대 집사 '송총각')가 선배 목사님, 그 목사님이 소개한 총각 하나랑 ‘빵기네집’을 찾아왔다. 전에 왜관 교부학회에서 보스코를 만난 적 있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학생으로 ‘방총각’이란다. 문제는 신촌에서 원룸 얻은 보증금 500만원이 가진 재산 전부. 나머지는 엄마에게 손을 벌리겠다나. 그 나이에 엄마에게 돈 얘기하는 것도 미안할 듯하고, 시골에서 그런 목돈 마련하는 게 힘들다는 걸 시골생활로 잘 알기에 전세금을 500으로 깎아주고, 매달 방세로 내던 50만원은 엄마에게 내려보내 목돈을 마련해서 장가가는데 쓰라고 정했다.
오늘 정부가 ‘부동산종합대책’을 발표했는데 있는 사람은 집이 수 채, 수십 채고 임대 소득으로 흥청망청 살면서 세금은 가능한 한, 기술적으로 안 낸다던데. 가난한 사람의 돈을 모질게 받아내서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면 과연 행복할까?
이 집 역시 우리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살다가 언젠가 놓고 갈 텐데.... 재물은 나누어 쓰고 함께 쓰라고 있는 것.... 보스코가 방총각더러 우리 없어도 언제라도 이사 들어오라며 집열쇠를 건네주었다. 며칠 전 박총각이 ‘이 집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합니다’라며 내놓고 간 그 열쇄다. 땅도 집도 방도 살 주인은 따로 있나보다. 아끼고 사랑하면 어느 곳도 우리를 품는 둥지가 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