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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빈 무덤이 말해주는 신앙 - 10월 26일에 깃든 의미를 찾아서 ②
  • 최진
  • xlogos21@catholicpress.kr
  • 기사등록 2017-10-31 19:23:44
  • 수정 2017-11-01 10: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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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전시된 안중근 의사의 사진. ⓒ 곽찬


108년 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이등박문을 처단하기 위해 오전 6시 30분 하얼빈에서 머물렀던 김성백의 집을 나왔다. 새 양복과 새 모자를 쓰고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며 새벽걸음으로 하얼빈 역을 향했다.


108년 후 순례단도 이날 오전 6시 30분 하얼빈 JINGU 호텔에서 ‘안중근의사 의거108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새벽미사 임에도 불구하고 순례단 모두 자리에 참석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신부가 미사에 앞서 지향을 설명했다. 천주교 신앙인 안중근 의사는 이등박문을 처단하기 위해 이 시각 하얼빈 역으로 향했고 그 뜻은 민족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미사 지향도 민족과 동양평화를 위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함께 염원하는 것이었다.


“안 의사 정신을 품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품는 것”


함세웅 신부는 “평화라고 해서 모든 것이 참된 평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평화가 있지만 거짓 평화도 있다”면서 “안중근 의사가 보기에 예수가 말한 참된 평화는 이등박문의 거짓된 평화와 야망과는 공존할 수 없었다. 안 의사는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안중근 의사는 민족평화와 동양평화를 위해 이등박문을 처단했고, 이것은 안중근 의사가 재판에서 일관되게 말했던 것”이라며 “집에 강도가 들어오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강도를 처단하는 것처럼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민족과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덧붙였다.


▲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신부. ⓒ 최진


오늘 우리는 안중근처럼 세상의 평화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가. 예수와 안중근처럼 자신을 희생해서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것을 신앙인들은 깊이 묵상해야 한다.


함 신부는 이등박문 처단이 108년 전에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사 강론을 맡은 청주교구 곽동철 신부는 “신앙인들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 ‘하느님을 마음에 모신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하느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평화와 정의를 가슴에 품고 사는 것 아닌가”라며 “이런 면에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우리 마음에 품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마음에 새기는 신앙과도 같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얼빈 역 9시 10분에 멈춘 시계


▲ 9시 10분에 멈춰있는 벽시계. ⓒ 최진


미사 후 순례단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먼저 안중근 의사 기념관부터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기념관은 원래 의거가 일어난 하얼빈 역에 위치했었지만, 하얼빈 역 개보수로 인해 현재는 조선민족예술관으로 임시 이전해있었다.


기념관에는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안중근 의사의 삶이 자세히 기록돼있었다.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순국했지만, 안 의사는 사업가, 기자, 군인, 학교장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직업을 가졌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 의사는 석탄 상회를 경영하다가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운동을 시작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무장 항일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의병활동에 뛰어든다. 이후 안 의사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되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처단한 신분으로 기억된다.


임시 기념관이지만 그곳에는 당시 하얼빈 역을 재구성해놓은 장소가 마련돼 있었다. 순례단은 그곳에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몸 바쳤던 순국선열들에게 감사와 존경이 담긴 묵념을 했다. 그리고 이들의 헌신과 희생이 후대에까지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랐다. 


그곳에는 9시 10분에 멈춰버린 벽시계가 걸려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처단한 순간이다. 의미를 전해 들은 순례단은 역사적인 순간에 멈춘 시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거짓 평화를 처단하고 참된 평화를 마련코자 했던 역사적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죽음을 앞둔 청년 신앙인의 고민은


이후 순례단이 108주년 기념행사에서 유일한 관광일정인 성소피아 성당에 잠시 들렀다. 성당 외부에서 10여 분간 기념사진 등을 남기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하얼빈 필수 관광코스인 소피아성당 주변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순국의 발자취를 따라 걷던 중이라서 그런지 관광지의 혼잡함이 낯설었다. 


다음으로 순례단이 찾은 곳은 조린 공원이었다. 22일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의사는 이 공원에서 동지들과 함께 이등박문을 처단할 계획을 의논하고 산책을 했다. 


▲ 안중근 의사는 공원에서 동지들과 함께 이등박문을 처단할 계획을 의논하고 산책을 했다. 또한 두 동생에게 자신의 유해를 이곳에 묻어달라고 전했다. ⓒ 곽찬

안 의사는 공원을 산책하면서 무엇을 고민했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암살 계획에 성공하기 위한 고민이 가장 중요했겠지만, 암살이 성공해도 안중근 의사는 본인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가족과 주변인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이등박문 처단 후 조선 앞날에 대한 걱정 등 죽음을 앞둔 그의 머릿속은 여러 생각과 고민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26일 의연한 발걸음으로 하얼빈 역으로 향해 나아갔다.


안중근 의사는 순국 직전 두 동생에게 남긴 유언에서 자신의 유해를 이곳에 묻어달라고 했다. 임시로 이 공원에 안장됐다가 독립이 되면 조선으로 옮겨달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두 동생에게 돌려주지 않았고 그래서 안 의사는 조린 공원에 안장되지 못했다. 그들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독립운동에 큰 구심점이 될 것이라 여겨 두려웠던 것이다.


함세웅 신부는 “안중근 의사의 무덤은 안 의사의 시신을 찾지 못해 비어있는 상태다. 하지만 가톨릭에서 빈 무덤이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라며 “안중근 의사의 빈 무덤은 우리 8천만 겨레의 가슴 속에서 참된 평화의 정신으로 부활할 것이다. 이번 순례단에 참가한 분들이 그 부활에 앞장서 달라”고 당부했다. 


일제 잔혹함을 드러내는 밀알이 되어


▲ 순례단은 일본의 잔악함을 상징하는 ‘731부대’의 유적지에 방문했다. ⓒ 곽찬


버스에 오른 순례단은 다음 일정으로 731부대 유적지를 방문했다. 한국인과 중국인, 몽골인, 러시아인 등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비밀 부대이자 기관으로, 일본군 위안부 만행과 더불어 일본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곳이다. 이곳에서 생체실험에 희생된 이들만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약 1만 명이다. 


유적지에는 일제가 저지른 생체실험 방식과 희생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영상과 사진 등으로 설명돼있었다. 쥐를 이용해 전염병을 실험하거나 성인 여자와 어린아이를 독가스실에 가두고 이들이 죽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고 한겨울 사람의 팔을 얼린 후 몇 도의 물이 사람의 피부를 가장 빨리 해동하는가 등을 실험했다.


왜 안중근 의사가 일제의 손아귀에서 조선을 해방하고자 했는지 알 수 있었던 일정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일본 제국주의의 손아귀에 하느님의 백성이 학살당하고 실험당하는 참상을 봤다. 그 참상을 어떻게든 끝내야 했기에,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이자 31세 청년 가장은 기꺼이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로 봉헌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부들로 이루어진 한국천주교회는 안 의사에게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다면 교회에 오지마라. 돌아오려면 독립운동을 포기해라’며 그를 내몰았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교회의 노골적인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원망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신앙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는 한국천주교회로 돌아가는 것 대신, 하느님 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교세확장과 신자들의 안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이 땅의 교회를 대신해 안중근 의사는 하느님의 도구가 됐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의거를 이뤄냈다. 그는 그렇게 제국주의의 참상을 세상에 드러낸 하느님의 밀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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