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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 일제 파시즘 도구가 된 이유
  • 최진
  • 등록 2017-11-01 12:28:56
  • 수정 2017-11-01 18: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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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30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일제 강점기 파시즘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제18차 정기심포지엄이 열렸다. ⓒ 최진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원장 함세웅 신부)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30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일제 강점기 파시즘과 한국교회’를 주제로 제18차 정기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심포지엄은 촛불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 한국사회에 발맞춰 교회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짚어야할 적폐의 역사를 명시하자는 취지로 열렸다. 발제자로는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과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그리고 한만삼 수원교구 신부가 나섰다.  


친일파가 장악한 종교계, 아직도 자기반성 없다


첫 발제를 맡은 김승태 연구위원은 ‘일제의 종교통제와 전쟁동원’에 관해 발표하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종교를 어떤 방식으로 통제해 왔고, 식민지배와 더불어 한국의 종교에 대해 어떤 정책을 폈는지 살폈다.


▲ 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연구위원 ⓒ 최진


김 위원은 “일본은 메이지유신 초기부터 국민 통합을 위해 종교인 신도를 국교화하고 천황을 절대화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창출했다”라며 “불교, 기독교를 국가 공인 종교로 삼고 이들을 국가 시책에 충실히 따르도록 통제하면서 위배할 경우 가차 없이 탄압했다”고 말했다.


이어 일제가 종교를 통해 내지인과 조선인의 내선융화가 이뤄지길 바라는 의도가 있었다고 짚으며, 총독시대에 들어서는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종교계에 신사세우기 등을 명령했고 기독교계가 신사참배 등 저항의 모습을 보이자, 노골적인 억압을 자행했다고 했다.


그는 “일제는 1930년대 초부터 식민지조선을 그들의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려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조선총독부의 종교통제도 같은 기조로 더욱 가혹한 형태로 이뤄졌다. 전시체제에서 종교단체들은 국책 수행의 보조기관으로 개편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전쟁동원이 이용됐다”고 말했다.


발제 토론에 나선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은 친일인명사전에 친일 종교인들이 등록되려하자, 종교계가 성명을 통해 강한 반발을 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친일파가 장악한 종교계는 오랫동안 어떠한 자기반성도 없이 과거의 잘못을 감추는데 급급했다. 오히려 친일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억압했다”고 지적했다.


한국 가톨릭, 친일 종교인 적극 옹호하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박수현 연구실장 ⓒ 최진


이어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전시체제기 가톨릭계의 부일협력’을 주제로 발제에 나섰다. 


그는 한국 천주교가 노기남 대주교의 친일 행위를 ‘어려운 시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노 대주교가 수동적인 친일행위가 아닌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했다는 점에서 교회가 반드시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짚었다.


박 실장은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한국 가톨릭교회는 일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제의 지배를 환영하기까지 했다”라며 “3·1운동 당시 신학생 일부가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 참여율은 극히 저조했다. 운동에 참여한 신학생들은 징계를 받거나 퇴학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가톨릭 교계제도가 주교를 정점으로 성직자들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노기남 대주교가 적극적인 친일 자세를 보이면서 한국 천주교 전체가 친일로 기우는 결과를 낳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마자, 천주교는 곧바로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신자들에게 비상시국을 맞아 더욱 충성할 것을 강조하는 ‘비상시에 처한 우리의 의무’라는 성명을 7개 주교 명의로 발표했다”라며 “10계명 중 4번째인 ‘부모에게 효도하라’를 ‘국가에 충성하라’로 바꿔 신자들에게 알렸는데, 여기서 국가는 당연히 일제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가장 친일행적에 앞장섰던 교구가 바로 서울교구임을 짚으며 “교회가 반민족적 친일행위에 적극적이었다는 것도 문제지만, 교회의 권위를 이용해 선량한 신자들을 제국주의의 전쟁터로 내몰았다는 점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 실장은 1910년부터 발행된 ‘경향잡지’가 가톨릭의 친일행적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짚었다. 기고된 성명서와 사설 등을 통해 당시 교회는 친일 행적에 열성을 보였고,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신자들을 전쟁에 참여케 하는 선동의 글들을 배포했다.


그는 “2008년 4월 29일에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을 발표하자, 서울교구는 바로 다음날인 30일 즉각 반박 성명을 내면서 ‘왜 가톨릭이 친일이냐’,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나’, ‘증거를 가져와라’며 항의했다”며 “당연히 책임을 지고 반성해야 할 교회 인사들을 감싸며 적극적으로 옹호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회의 미래 위해서 성찰·반성해야”


▲ 수원교구 한만삼 신부 ⓒ 최진


일제강점기 가톨릭교회의 제도성에 대한 반성을 주제로 수원교구 한만삼 신부가 마지막 발제에 나섰다. 


그는 프랑스 교회가 반교황주의를 내세우며 국가와 친분을 쌓던 ‘갈리아주의’, 그리고 하느님 구원 방식에 대한 엄격주의인 ‘얀세니즘’에 물들어 있었다며, 박해 이후 초토화된 교회가 프랑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성형됐기 때문에 일제에 협력하는 교회의 모습이 나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조불조약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교세확장을 목적으로 친 중앙정부와 친 지주 활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교회와 신자들이 받는 피해에 대해서는 프랑스 정부의 외교력을 동원해 군함까지 출동시킬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처했지만, 조선백성들이 조선정부와 기득권층으로부터 받는 불의한 대우나 수탈에 대해서는 정교분리 원칙으로 침묵했다”


한 신부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정교분리 정책은 일제의 파시즘의 도구가 돼, 종교지도자 스스로 정치적 무능함과 무관심을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역설적으로 일제에 협력하는 모습이 됐다”고 지적했다.


천주교는 1924년 천주교 유지재단을 승인받음으로 조선 총독부 체제 아래 합법적인 기구로 자리 잡았지만 오히려 교회 설립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총독부의 통제에 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 신부는 “교회가 총체적으로는 분명한 잘못을 했고 이것을 반드시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무조건적인 단죄는 또 다른 단죄를 낳을 수 있다.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도 후대에 가서는 어떤 판단을 받을지 모른다”라며 “교회의 친일역사를 살피는 것이 중요한 것은 과거의 행적을 살펴 앞으로 교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분명한 것은 지난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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