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1일 수요일, 맑음
‘모든 성인들의 날’은 가톨릭에서는 대축일이다. 나처럼 개신교에서 온 신자에게는 교회에 무슨 성인이 그렇게 많은지 기억하기도 힘들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이름이 명부에 오르지 않은 성인들을 모두 모아 한 상으로 제사를 올리는 셈이다. 또 거룩하게 살면 누구나 성인될 여지가 있다는 얘기 같다. “성인 되소서”라는 인사말도 있어 왠지 모르게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나라처럼 어른이 되어 영세를 하면 본래의 성씨와 이름에 성인 성녀 이름 하나를 골라 ‘세례명(洗禮名)’이라고도, ‘영명’(靈名)이라고도, 심지어는 ‘본명(本名)’이라고까지 한다(전순란 + 맘마마르가리타). 그분이 내 ‘수호성인(守護聖人)’이 되어 어려운 일 있을 때마다 빽이 되어 주신단다(실제로 그렇다). ‘수호성인’의 성격까지 따라 간다는 말도 있다. 우리 보스코의 어머니 ‘맘마마르가리타’를 내가 수호성녀로 모셔선지 실제 남편의 '엄마’ 노릇을 톡톡히 한다.
늦가을의 도봉산과 삼각산
우리 엄마가 갈수록 귀가 어두워져 소리를 못 들어선지 ‘유무상통’으로 몇 번을 전화해도 아예 받지를 않으신다. 어제도 오늘도 열 통 넘게 전화를 했는데도 대답이 없어 오늘은 아예 차를 몰고 두 시간 달려 엄마네 실버타운엘 왔다. 더구나 이번 일요일이 엄마의 96세 생신이니 축하도 해드려야 했다.
막 도착하니 점심시간. 엄마가 멀리서 나를 발견하시고 예의 그 동작, 외국 국가원수가 국빈방문을 와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며 손을 흔드는 멋진 동작으로 인사를 하신다. 정말 우리 엄마의 인사에는 우아미와 절도가 있다! 갈수록 희노애락의 경망스러운 감정이 사라지고, 그렇게 기쁜 일도 그렇게 슬픈 일도 없다는, 심하게 화낼 일도 심하게 걱정할 일도 없다는 듯 빙긋이 웃으시는 게 전부다. 인생을 도통하고 달관하신 경지다.
식사 후 엄마 방에 올라가 과일을 까 드리며 “엄마 맛있지?” 물으면 “과일 맛이 다 그렇지 뭐.” 하신다. ‘식탁에 나오니까 먹고 주니까 먹을 뿐’이라는 말투다. 맛없다거나 입맛 없다는 말씀도 없다. 원로 장로님이셔서 기도를 부탁하면 열심히 하시지만 예전처럼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쫓아다니던 종교심마저 초탈하셨다. 그저 “하느님 감사합니다!”가 신앙의 전부다. “엄마, 이젠 교회도 안가?” 물으면 “예, 장로가 교회를 안가면 어쩌니?” 하시지만 주일이 언제인지 잊으신 지도 오래고, 교회를 못 가신지도 여러 해다.
15년 전쯤 엄마가 휴천재를 방문하셨을 적 우리 가족사진
엄마 마음의 기둥은 오빠고 마음의 정 가는 데는 호천이다
하지만 울 엄마가 딱 한번 화알짝 웃으실 때가 있다. 용돈을 드리면 “고맙다!” 라며 밝게 웃으신다. 그러고선 아무데나 버려두신다. “엄마, 돈은 어디다 쓰는데?” 물으면 그렇게나 말이 없던 분이 돌연 사설이 늘어진다. “교회에 헌금 내고… 얘, 교회를 고친다는데 아무래도 내가 장로고 교회도 가난한 교회라서 내가 제일 많이 내야 하지 않겠니?” 정말 엄마는 저 돈을 그렇게 쓰신다고 확신하시는 것 같다.
오후 3시쯤 호천이가 올케랑 왔다. 보통 오기 전 서로 연락을 해서 형제간이 겹치지 않게 오는데 평일에 내가 와 있으리라 생각 못했나 보다. 걔도 이번 일요일 엄마생신에 못 오므로 오늘 당겨 왔단다. 엄마에겐 호천이가 최고의 효자다. 걔는 오자마자 엄마가 전화벨 소리가 작아서 전화를 못 받으신다며 전화기를 뜯었다. 엄마가 전화를 안 받아 달려왔으면서도 나는 무심코 있었는데…
나더러 배터리를 사오라 해서 일층에 내려간 사이 호천이가 엄마에게 물었단다. “누나 어디 갔어요?” “얘, 너희 누이 안 왔다. 그저께 왔다갔어.” 또 시험 삼아 바로 엄마 곁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와 한참 통화하던 호천이가 “엄마, 지금 누구랑 전화해?”라니까 “너의 형하고. 호건이는 자주 전화해.” 하신다.
엄마랑 이모를 모시고 호천이네 부부와 함께 안성시내로 나가 저녁을 먹었다. 호천이는 내일 출근을 위해 떠나고 나는 남아서 뼈만 남은 엄마 손을 잡고 밤을 보낸다. 이럴 날도 별로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슬프기보다 그저 담담하다. 나도 엄마한테 물들어 인생을 달관해 가는가 보다, 종일 책상에 앉아 있을 보스코가 점심을 어떻게 먹었고 저녁엔 뭘 먹었는지도 안 묻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