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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의거가 순례단에 전한 신앙
  • 최진
  • 등록 2017-11-03 11:44:42
  • 수정 2017-11-07 11: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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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날은 신성국 신부의 주례로 아침미사가 봉헌됐다. ⓒ 최진


안중근 순례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이날도 역시 호텔 408호에서 새벽 미사로 순례단 일정이 시작됐다. 마지막 날이라 아쉬움이 있었지만, 순례가 시작되기 전과는 사뭇 다른 활기찬 기운이 미사 전례에 맴돌았다.


순례단의 마지막 일정은 동북항일열사기념관이었다. 이곳은 중국 공산당이 만주 일대에서 무장 항일투쟁을 했던 기록과 자료들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만주는 항일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라, 중국 정부는 만주 지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저항 역사를 기록해 애국심 고취의 수단으로 만들어 놨다.


조선인 없이 항일투쟁 역사 기록 안 돼


한국에는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정도가 항일투쟁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것은 만주에서 벌어진 전투 중 극히 일부였다. 일본군 기록에 따르면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만주지역에서 일본부대가 전투를 치러야 했던 횟수는 12만 번 이상이다. 관동군 초기부터 화북사변을 거쳐 관동군 숫자가 70만 명까지 늘어나도 항일투쟁은 그칠 줄 몰랐다.


▲ 동북항일열사기념관 ⓒ 곽찬


중요한 것은 중국의 항일투쟁 역사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만주 항일투쟁이 대부분 조선인 손으로 일궈낸 역사라는 것이다. 


윤원일 안중근평화연구원 부원장은 “중국 공산당이 창립되고 이들이 만주에 들어온 것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다음이다. 이때 만주성에도 공산당이 설립되는데 당시 공산당원 3000명 중 95%가 조선인들이었다. 공산당이 이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을 했다는 것은 대부분 조선인이 전투를 치른 것이다”고 설명했다.


또한 “장백과 백두산 일대는 여진족의 발상지라서 청나라 때는 봉금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들어와 살지 못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조선인뿐이었다”며 “처음 이 지역 항일투쟁에는 아예 중국인들이 없었다. 만주지역 항일 투쟁의 역사는 조선인민혁명군에서 시작돼, 30년대 동북인민혁명군으로, 그리고 35년 이후에 이르러 동북항일연합군으로 발전했다”고 덧붙였다.


중국 정부는 중국 공산당이 항일투쟁을 시작한 30년대 이후 역사부터 정리해 기념관에 담았다. 30년대 이전 역사는 아직 정리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록되지 못한 30년대 이전의 투쟁도, 기록으로 남겨진 30년대 이후의 투쟁도 대부분은 조선인들의 역사로 꾸려진 것이었다. 


그래서 역사적 우월감이 상당히 높은 중국 정부도 동북 항일역사에서는 조선인들의 기록을 뺄 수 없었다. 조선을 지운다면 항일 역사를 제대로 기록할 수 없었을 정도인 것이다. 그래서 ‘통일전선 동북항일연합군’의 ‘연합’은 조선과 중국 공산당을 뜻이다. 전시관을 돌아보던 한 순례자의 입에서 “만주는 우리 땅이다”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단강 인근에서 일본군에 포위당한 부대가 있었다. 대부분의 부대원은 도망쳤고 8명의 여자가 남아 끝까지 일본군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총알이 다 떨어지자 이들은 목단강에 투신해 장렬히 전사했다. 이때 가장 어린 나이에 죽은 사람이 12살인데, 이 아이도 조선인이다. 마지막 총알은 자신을 위해 남겨놓기 마련인데, 이들은 마지막 한발까지도 일본군을 향해 쐈다”


▲ 가장 어린 나이로 독립을 위해 싸워간 아이. 그녀의 나이는 12살이다. ⓒ 곽찬


안내원은 만주 벌판이 전투를 치르기에는 매우 힘든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겨울의 혹한도 문제지만, 먹을 것이 한참 부족한 지역이라 식량난이 문제라고 했다. 나라를 잃어 민간 지원에 의지해 전투를 치러야 했던 조선인들의 고통은 더욱 컸으리라. 


만주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연합군 장수들을 소개하는 상황에서는 ‘조선인’이라는 말이 계속 들렸다. 한국에서도 독립운동가로 기념하고 있는 이홍광 역시 중국 역사에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참모장으로 기억된다고 했다. 그는 25세의 나이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순례단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파가 몰아치는 만주벌판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일본군과 싸우다 죽어간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12살 어린아이부터 25세 청년까지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숭고한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을 그동안 한국사회는 얼마나 기억하고 살았을까.


안중근과 함께한 순례의 의미


이번 여정에서 순례단은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와 이상, 그리고 신앙심을 보았다. 731부대 유적지를 보면서 잔혹한 일제의 만행을 보았고 이러한 만행을 평화라고 선전하던 일제의 이중적인 상황을 봤다. 그래서 총을 들고 적장을 쏴 죽인 안중근 의사의 정당함을 느꼈다.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이 땅 백성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선교사 안중근은 일제의 거짓 평화가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얼빈 역에서 이등박문을 향해 총을 쐈고 참된 평화를 위한 문을 열었다.


비명이 울리던 여순감옥에서도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했고, 이러한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았다는 것을 회고록을 통해 밝혔다. 자신을 외면했던 프랑스인 성직자들에게도 죽기 전 서신을 보내 고통받는 조선 백성들을 위해 달라고 했다.


▲ 순례 둘째 날,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하얼빈 역을 재구성 해놓은 장소에서 묵념 중인 순례단. 벽시계는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처단한 9시 10분에 멈춰있다. ⓒ 곽찬


순례단에 참가했던 배수용 씨는 “안중근 의사의 삶과 열정, 그리고 저서로 남겨진 그분의 뜻을 보면서 자랑스러웠다. 이번 순례에 참여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왜 안중근 의사는 체 게바라처럼 다양한 문화콘텐츠 적인 접근이 미흡한가’라는 의문이다. 체 게바라가 전 세계인들에게 저항의 상징이듯, 안중근 의사도 전 세계인들에게 평화를 위한 저항의 상징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문영 씨는 “순례를 하면서 우리 역사가 많은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 벅차게 다가왔다. 의사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하면서 현장에서 느낀 벅참이라 더욱 깊게 다가왔다”라며 “우리 학생들이 이 순례에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다. 미래를 책임질 우리 아이들에게 이곳은 벅찬 자부심으로 남겨질 소중한 장소다”라고 말했다.


인천교구 김병상 몬시뇰은 “이번 순례를 하면서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다녔던 행사 중 가장 의미가 깊었다. 안중근 의사의 참모습을 다시 확인했고, 그분의 생애가 건네는 깊은 신앙의 의미를 느끼게 됐다. 그분의 훌륭하신 신앙과 의지가 우리 안에 오래도록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원일 기념사업회 부원장은 “북한은 오로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국가의 핵심적인 정신체제로 내세우면서도 안중근 의사에 대한 존경과 관심을 일관되게 이어오고 있다”라며 “안중근 의사의 의지를 기리는 것은 남북의 교류로 이어지기 충분하다. 민족자유와 동양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안중근 의사는 이제 남북 분단의 현실을 극복해나갈 새로운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순례단은 하얼빈 국제공항을 통해 인천으로 돌아왔다. 순례단에 처음 참여한 사람들은 몰랐던 역사의 감격스러운 체험을 했다고 입을 모았고, 순례단에 자주 동참했던 이들은 매번 순례에 참여할 때마다 다가오는 안중근 의사의 신앙이 새롭다고 말했다. 


안중근기념사업회는 2018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9주년 행사로 러시아에서부터 하얼빈, 그리고 여순으로 이어지는 순례일정을 계획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항일투쟁을 위해 걸었던 역사적인 발걸음을 동행하는 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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