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0일 월요일, 맑음
내동댁 밭을 내려다보니 뭔가 휑하고 허전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 있던 ‘할머니집’이 없어졌다. 내동댁 친정엄니로 딸만 둘인 집에 손을 이어주겠다고 둘째부인으로 들어왔는데 할메도 딸랑 딸 하나(지금의 내동댁) 낳고는 손도 못 이어준 채 영감도 떠나버렸단다.
그래도 100평 쯤 되는 땅 뙤기 하나와 단칸집은 그분 몫이었다. 어려서 나무에서 떨어져 앉은뱅이가 되었고 우리가 25년전쯤 이 마을에 집을 지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언제나 툇마루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할머니의 긴 다리, 외동딸 내동댁의 키로 보아 훤칠하게 멋진 아가씨였을 텐데 사고로 그만 운명이 망가졌고, 그래도 처녀 귀신은 안 만들겠다는 부모님 뜻 따라 세동에서 오리 남짓 떨어진 문정으로 시집이라고 온 것이다.
지금은 초등학교 선생이 된 손주가 아침저녁으로 할메집을 들여다보고, 가끔은 외로운 할메 곁에 앉아서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했다. 늘 풀을 베어다 외양간에 소꼴을 넣어주던 손자와 외양간의 소는 ‘말과 소년’처럼 둘 다 눈이 크고 선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남은 유산이라고는 쓰러져가던 저 집이 전부였는데 할메는 그 집과 집터마저 남편 조카에게 넘겨 단 하나의 핏줄인 딸을 서운케 했다. 제사라도 얻어먹으려면 시조카에게 줘야 한다며… 우여곡절 끝에 그 땅과 집은 황소와 소년에게 돌아왔지만 저 집이 헐렸으니 할메의 모든 흔적은 사라졌다. 삼베처럼 거친 그니의 인생도 인생이라고 갔다.
어제 오후 휴천재에 마실온 ‘드물댁’이 전해준 다른 집 소식은 나를 더 슬프게 했다. “그 집은 애시 당초 그 집을 팔지 말아야 했어. 윗집을 팔고 아랫터에 새집 짓고 난 뒤로는 되는 일이 없었어. 작은아들 죽고, 영감 죽고, 왕할메 치매 걸리고, 막내아들이 어메 돌본다고 내려와 있다가 가끔 며느리도 디다 보더니만, 그날도 어둑한 저녁에 먼 생각에 며느리가 서울 간다고 나서드만 그 사단이 나지 않았겠어? 우울증이래야. 우울증은 누가 자꾸만 귀에다 대고 뭔 말을 해 싸 못살게 한다드만, 그래 세상을 버려버렸어.” 갓 오십을 넘긴 나이니 너무 아깝다.
아침에 인대가 늘어난 팔을 치료받으러 읍내에 나가는 길에 목현까지 태워다 준 ‘용수막댁’이 한 말에, 그니의 사연은 더 간절했다. “이 새댁은 어렸을 때도 오메 없이 커서 엄청 고생을 했대. 그래도 사엄씨 제 정신일 땐 사람처럼 살았는데, 시엄씨마저 세 살 배기가 되어 엄청 성가시게 했으니 뭔 시상 살고 자펐겄어?” ‘아하, 그래서 서둘러 떠났구나!’ “요샌 밤마다 그 집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소리가 들려와, 노래도 불러 보고, 뭔가 두드려 패는 소리가 나는데 사람들이 암 말도 안혀.”
아내의 죽음, 치매 엄마를 아예 요양원으로 보내버리고 혼자 남은 아들을 말없이 지켜보는 동네아짐들의 눈은 다들 애잔하다. 갓난아기였을 때 들여다보았고, 아장아장 동네를 걸어 다니던 그 아가가 초등학생 중학생 대학생이 되었고, ‘군인아저씨’가 되어 이쁜 각시 데려와 싱글벙글 이 집 저 집 인사시킨다고 데리고 다니던… 자기 갓난이 적 갓난이 같은 아이를 낳고, 외지에 나가 살다 치매 걸린 엄니 돌봐드린다는 효성으로 돌아왔는데… 용수막댁의 그집 회상이다. 마을 샘터로 되돌아 흐르는 골짜기 물처럼 세월의 도랑물에 함께 손 적셨던 이웃들, 너나없이 넘나들며 살아온 사람들만이 함께 갖는 아픈 세월, 아픈 기억이다.
진주 옥봉성당에서 ‘사제단’ 총회를 한다며 한 번 다녀가시라는 김인국 신부님의 초대가 있어 4시경 진주로 떠났다. 40년 전 사제단을 창립한 함세웅 신부님, 김병상 몬시뇰도 와 계셨다. 사제단의 기도회나 그 신부님들이 계시던 본당에 강연초청을 받을 적마다 보스코랑 함께 갔으므로 신부님들이 다 나를 알고 계시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소용돌이 칠 때마다 바른길로 앞장서 걸어온 신부님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돌아왔다. 작년 말부터 온 국민이 촛불시위로 일어나 혁명을 일으키기까지, 내 생각에는, 오래오래 촛불혁명의 불쏘시개를 피워온 이들이 이 신부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