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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 대림 제1주일 독서・복음 묵상
  • 김수복
  • 등록 2017-12-01 17:32:57
  • 수정 2017-12-01 17: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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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 63,16ㄴ-17; 64,1.3ㄴ-8) 해설

‘아버지’요 ‘구원자’인 하느님은 당신 백성이 지은 죄를 용서하여 잊고, 다시금 구원을 가져다주는 영원한 샘으로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이 대목은 더 긴 기도문(이사 63,7-64,11) 안에 들어 있다. 이 기도문은 일종의 탄원하는 시(詩)로서, 귀양살이하던 사람들이 거룩한 도읍에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과 성전이 재건되는 모습을 보고 부른 노래일 것이다.


‘아버지요 구원자’(63,16-17; 64,1.3). 이 기도에서는 하느님을 애정을 기울여 친근하게 아버지라는 칭호로 부른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아버지께 신뢰심을 가지고 의탁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난날에는 줄곧 충실치 못했을망정, 자식이 자기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처럼, 깊은 사랑과 너그러움을 하느님께 기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아버지와 구원자로 알아 모시고, 애정과 신뢰를 기울여 그분께 탄원을 드린다. “당신의 종들을 생각하시어… 하늘을 찢고 내려오십시오.”


“우리가 죄를 지었나이다! 우리를 용서하십시오.”(참조. 64,4-8) 과거에 저질러온 자기네 잘못을 깨닫고서 ‘충실하신’ 하느님께 용서를 빌면서 마음으로부터 뉘우치고 생활방식을 바꾼다.


파라오 밑에서 시달리던 노예살이에서 당신 백성을 탈출하게 한 하느님이 당신께 신뢰하는 그들을 다시금 풀어주실 것이다.


겸손하게 뉘우치는 가운데 고백하는 그 같은 신뢰심은 희망찬 밝은 미래를 예고한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막연하고 암담할지라도, 하느님의 놀라우신 능력이 뜻밖의 모양으로 드러나 우리를 구원하고 해방할 것이다.



시편(79) 해설

주 만군의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주님의 ‘포도밭’을 두고 간청을 한다. 지금은 비록 황폐해졌지만, 다시 풍성한 포도밭으로 만들어 주시라고 간청한다. 케루빔 천사들에 둘러싸여 계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로서, 당신 양떼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목자이신 하느님’, ‘당신 포도밭을 일구어 가꾸시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도 나오고 신약성경에도 나온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거는 기대와 신뢰를 나타낸다. 하느님이 자기들을 당신의 사람들로 선택하셨다는 자부심을 나타낸다. 하느님이 늘 자기들을 보호하고 지켜주시리라 믿는다. 그렇게 개입하여 주시라고 하느님께 간청한다(18절).


결국, 백성의 간청에 못 이겨 하느님이 개입하여 구원하신다. 더 이상 그들에게서 멀리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느님과 친하게 지내야만 충만한 생명과 기쁨을 영원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2독서(1코린 1,3-9) 해설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우리는 하느님이 내려주시는 여러 가지 선물을 받아 강해진다.


이 대목은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인사말에 속한다. 그 안에는 문안인사와 감사드리는 기도와 주님의 날을 상기시키는 말이 나온다.


‘은총과 평화’(3절) 이 표현으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안인사와 격려를 보낸다. 은총은 하느님이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마음을 쓰고 돌보아주심을 뜻한다. 


평화는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하느님과의 온전한 화해이다.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우리 마음의 평온함이다(갈라 5,22). 은총과 평화야말로 인류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두 가지 선익이다. 그 선익은 하느님으로부터만 나온다.


‘감사드린다’(4-6절) 바오로 사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특징 한 가지를 지적한다. 그것은 하느님께 받은 모든 은혜에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태도이다. 바오로는 여기에서 특히 코린토 신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여러 가지 은총과 특은을 보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고대한다’(7-9절) 주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넘치게 내린다. 하느님은 충실하신 분이어서 그 날에 서슴없이 나설 수 있도록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그러한 확신은 기본적으로 하느님의 충실하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9절). 우리를 당신 외아들과 친교를 누리도록 불러준 하느님은 온갖 은총의 선물로 우리를 채워주고, 마지막 날 다시 오시는 그분을 만나 기뻐 용약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보증이 되신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고 과시하면서 살아가는 모험을 감행할 일이 아니라, 오로지 충실한 하느님의 보호하심과 능력에 의지하여 살아갈 일이다. 하느님은 믿는 사람들 속에서 그러한 사업을 이미 시작했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이다(참조. 필리 1,6).



복음(마르 13,33-37) 해설

‘깨어 있는 태도’는 주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실 날을 기다리는 신자들이 언제나 지켜야 할 기본 태도이다


‘깨어 있으라’ 이 말은 복음서의 중심 요소에 속한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으라는 당부를 당신 주위에 있는 몇몇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하고 계신다.


이 말마디의 뜻은 ‘밤’과 ‘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내용 가운데서 드러난다. 그렇지만 그 말마디가 지닌 신학적인 의미는 훨씬 더 넓고 깊다. 복음서들에서 ‘밤’은 흔히 시련과 유혹과 수난을 상징한다. 이 때 ‘잠든다’는 것은 ‘어두운’ 일들에 묻혀 사는 생활태도와 생활습성을 뜻한다. ‘깨어 있다’는 것은 복음의 빛에 비추어서 자기가 처한 상태와 주위 상황을 판단하여 어두운 구덩이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와 결정적으로 만날 날을 향하여 줄기차게 나아감을 뜻한다.


‘기다리는 구체적인 노력’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또한 고대하며 기다리는 가운데 자기가 맡은 사명과 임무를 다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하는 신자이다. 우리는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을 깨어 기다리는 신자의 태도가 어떠한 태도인가를 분명히 판단해야 한다.


현실 생활과 동떨어진 허망한 환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는 결코 주님을 기다리는 상태가 아니다. 태어나면서 무덤에 묻히기까지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생살이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한번뿐이고 다시 살 수 없는 우리 생애의 시간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보내느냐에 깨어 있느냐와 잠자느냐가 달려 있다.


예수를 닮고 예수답게 살려는 사람은 누구든 예수님께서 살고 가신 인생목표를 자기의 인생목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 인생목표를 따라 꿋꿋하게 살아가는 상태가 깨어 있는 상태다.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마중 나갈 수 있는 상태이다.


예수님의 인생목표는 인류 안에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져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데 있었다. 하느님의 뜻이 인류 안에 이루어지게 하는 데 있었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인류가 당신을 아버지로 모신 똑같은 형제자매로서 한마음이 되어 기쁨을 누리는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내 삶이 그 목표를 향하는 삶일 때 비로소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며 깨어 있는 삶이 된다.



묵상


우리는 모두 기다리는 사람이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삶은 인간들끼리 사회 안에서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기쁨을 누리라고 주어진 귀중한 기회이다.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살려내야 하는 기회이다. 그와 동시에, 약속이 보장된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하느님을 갈구하고 있다. 실상 온 우주가 구원을 대망하며 탄식하고 있다.


역사(歷史)는 성장하는 생명의 진화과정으로서 자기의 궁극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교회는 특히 대림절 전례에서 그 같은 대망(待望)의 신비를 되새기고 되살리고 있지만, 실상 인류 역사 전체가 늘 대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인류 역사와 각 사람의 인생사가 거치는 대망의 진로는 극적인 긴장과 갈등을 수반한다. 악(惡)의 세력이 온갖 위협을 하고 온갖 장애물을 던지고 온갖 유혹과 환상을 일으킨다. 그렇지만 악의 세력보다 훨씬 강한 분의 능력이 그런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온갖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게 해 준다.


주께서 오신다.


무엇인가를 고대하고 성취하고픈 욕구는 하느님이 주신 인간 본성에서 우러난다. 우리 인간은 기다리는 존재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기다림의 상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다(2티모 4,8).


그리스도께서는 예전에 오셨고, 이미 와 계시고, 현재 오고 계시며, 장차 오실 것이다(묵시 1,4; 4,8). 예언자들이 수세기에 걸쳐 하느님께 탄원하며 기다리던 구세주가 인간으로 태어나셨다.


인간으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역사 속을 통과하셨다. 사람들을 함께 살게 하여 구원하는 일생을 살고 가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끝 날까지 인류와 더불어 살아 계신다. 시간의 세월이 끝맺음할 때 다시 와서 당신의 본 모습을 백일하에 명명백백히 드러내실 것이다. 그 날 그분과 더불어 그분을 따라 그분처럼 살다 가고 살아온 모든 사람의 본모습과 가치와 광채도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이 순간 우리의 처신과 행동, 마음씀씀이, 생활태도, 목표설정, 인생성취의 방향설정에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다. 그분을 지금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것은 나의 자유선택에 달렸으며, 그 선택 결과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오시는 예수를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우리의 자유선택은 비단 자기 개인의 선택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불가분 가정, 사회, 국가, 인류공동체 안에서 내리는 선택이다. 타인들과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 하는 선택이다. 공동체 사회의 성격을 규정해가는 선택이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출발점은 예수다운 삶을 택하는 ‘나의 선택’이다. 올바른 ‘나의 선택’을 제쳐두고 불합리한 반(反)인간적 사회구조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되짚어서 역설적으로 말하면, ‘불합리한 반인간적인 사회구조’에 눈을 뜨고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나 자신을 개조할 수가 있고 올바른 ‘나의 선택’, 올바른 ‘내 삶의 방향’이 제대로 잡힐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릴 뿐 아니라, 내 가정, 내 국가, 내 인류가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다.


인류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한다 함은, 지금 현재 인류공동체사회 안의 온갖 관계를 그리스도의 복음에 입각하여 부단히 수정하고 개선해나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따뜻하게 서로 위해주는 인류가정’을 형성하려고 노력함을 뜻한다.


그런 ‘인류가정’이 완성될 때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런 인류가족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리스도와 더불어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백성을 이룰 것이다. 그런 인류가족은 시공 안에 있으면서도 시공을 초월하여 하느님 안에 있게 될 것이며, 예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대림 제1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이사 63,16ㄴ-17; 64,1.3ㄴ-8)

<하늘을 뚫고 내려오소서>


주님, 당신만이 저희 아버지시고 예로부터 당신 이름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 어찌하여 저희를 당신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저희 마음이 굳어져 당신을 경외할 줄 모르게 만드십니까? 당신 종들을 생각하시어, 당신의 재산인 이 지파들을 생각하시어 돌아오소서. 

마치 불이 섶나무를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하리이다. 이는 당신의 적들이 당신 이름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니 민족들이 당신 앞에서 무서워 떨리이다.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보지 못하였고 아무도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어떠한 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의로운 일을 즐겨하는 이들을,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을 기억하는 이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죄를 지었고 당신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당신의 길 위에서 저희가 늘 구원을 받았건만 이제 저희는 모두 부정한 자처럼 되었고 저희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들도 모두 개짐과 같습니다. 저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어 저희의 죄악이 바람처럼 저희를 휩쓸어 갔습니다. 당신 이름 부르며 경배 드리는 자 없고 당신을 붙잡으려고 움직이는 자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희를 외면하시고 저희 죄악의 손에 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은 저희 아버지십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 주님, 너무 진노하지 마소서. 저희 죄악을 언제까지나 기억하지는 말아 주소서. 제발 굽어보소서. 저희는 모두 당신의 백성입니다. 


시편(79)

주 만군의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제2독서(1코린 1,3-9)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린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에게 베푸신 은총을 생각하며, 여러분을 두고 늘 나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모로나 풍요로워졌습니다. 어떠한 말에서나 어떠한 지식에서나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여러분 가운데에 튼튼히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여러분을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복음(마르 13,33-37)

집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지켜라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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