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7일 목요일, 흐림
서현동 성당 마당에 눈이 쌓였다. 밤새 마당에서 잠들어 있던 내 차도 얇지만 포근하게 눈이불을 덮고 잠에 빠져있다. 본당주임 배신부님이 빗자루로 눈을 털어 소나타의 잠을 깨웠다.
도우미 아줌마가 아침에는 안 온다며 신부님이 아침상을 차려주셨다. 어젯밤 김신부님의 소개대로 ‘달걀요리의 달인’다운 밥상이 나왔다. 계란프라이에, 삶은 계란에, 계란 씌운 스팸부침! (그리고 커피와 사과). 단백질 하루치 필요량이 완전 충족되는 식탁인데 나는 왜 속으로 쿡쿡 웃음이 나왔을까?
신학교 출신으로 요리만 아니라 살림전반에 ‘무능의 완결판’ 우리 보스코 같은 사람도 있으니, 앞으로는 도우미 아줌마들 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져 혼자 식사를 마련하고 혼자 빨래하며 살림하는 사제가 많아지는 추세니까, 사제학교에 필수로 요리 코스를 마련해야겠다. 밥상을 준비하느라 힘들었는지 신부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배어 있다.
오늘이 대설이라는데 안동을 떠나오는 마을들은 빠네또네에 가루설탕 뿌린 만큼만 눈을 쓰고 간간이 피어오르는 연기까지 있어 겨울이라는 기분을 주긴 한다. 점잖은 안동사람들이 양반다리로 마주 앉아 맞담배라도 피는 정경이랄까?
서울에서 휴천재까지 거리가 300km를 넘다가 안동에서 함양까지 230km라는 거리가 내비에 나타나자 지척인 듯 느껴지고 운전하기도 수월하다. 고속도로라지만 자동차 숫자도 적고, 싸락눈과 가랑비가 오락가락해 ‘미끄러지기 딱 좋은 날’이지만 안개비 내리는 몽환적인 산언덕을 즐기며 천천히 달렸다.
이런 날은 오랫동안 잊혀진, 그러나 찾아보고 다독여 줄 친구들이 생각난다. 운림원 영숙씨는 3년 전 몸이 갑자기 안 좋다던 남편이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고, 수술을 받더라도 3개월 을 못 넘긴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고도 두 사람 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런 일은 안 일어 날 거야, 일어나서도 안 되고!” 라고 다짐했단다.
그렇게 담담한 심경으로, 건강에 좋다는 음식은 다 만들어 남편을 돌봤는데 위장을 다 들어낸 수술을 받고서 6개월 후 그를 검진한 의사가 놀라며 암세포가 몽땅 사라졌다는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올여름, 우리가 없는 사이에, 올케가 세상을 버려 맘고생이 많았을 게다. 지금부터 조청을 고우기 시작하면 내년 설까지 콩유과 만들기가 끝날 때까지는 틈이 없을 것 같아 점심을 함께 하자고 전화를 했다.
‘인간승리’ 정옥씨도 이번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는데 축하도 해줄 겸 같이 만나기로 했다. 시인이 되기를 꿈꾸는 그니는 불과 3년 안에 중등학교졸업 자격검정고시들부터 초급대학 코스까지 모든 과정을 해냈다. 의지의 한국 여인으로 이번엔 방통대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하여 문창과를 거쳐 시인으로 등단하겠다는 고지가 바로 눈앞에 보인다. 가난하다고 해서, 딸아이라고 해서 탁월한 재능을 갖고서도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억울한 여자들이 시골일수록 많다.
소녀처럼 착한 부드러움 속에 그니 같은 강인함이 숨어 있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식사 후 영숙씨네는 조청을 봐야 한다며 먼저 가고, 정옥씨랑은 ‘콩꼬물’에서 차 한 잔을 하며 얘기를 나누고 혜화동 방통대 계절학기에 다닐 때는 우이동 집에 묵으라고 초대했다.
마리오가 보내온, 앞산 산마르티노의 저녁놀
오후 3시에 휴천재에 돌아왔다. 닷새만이다. 우선 벽난로에 재를 치고 불을 피우고 장작을 날랐다.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다 흰 연기가 되고 색갈이 약간 옅어지면 방안에 온기가 돈다. 라디오를 튼다. 산속이라 뉴스라고는 주파수가 MBC가 고작인데, 그동안 들을 수도 안 들을 수도 없어 고민하던 방송국에서 오늘 최승호 PD가 사장이 되었다는 소식이 내게는 그야말로 복음으로 들리는 뉴스다.
몸고생 맘고생을 많이 했던 사람들이 고달픈 삶으로 수업료를 지불했으니 그 열매를 사회가 바로 서는데 되돌려 주리라 믿는다. 언론이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선다는 걸 곧 목격하리라는 생각에 신난다. 우리 손석희 jtbc사장에게는 선의의 경쟁자가 생기는 셈이니 더 좋은 방송을 보게 되겠지. 보수언론으로 통칭되는 것들이 쏟아내는 구정물을 말끔히 몰아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