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3일 수요일, 맑음
봉재언니가 ‘쭈쭈빵빵’ 시절의 사진을 보내줬다. 처녀 적에 담임을 맡았던 학생들을 얼마 전 반세기 만에 만났는데 추억의 사진들을 보내왔더란다. 알에서 갓 부화한 듯한 고만고만한 중학생들의 귀여운 모습이 60여 명. 보스코에게 보여주니 “그때는 한 반에 아이들이 참 많았어. 우리 서석초등학교(광주) 6학년만도 한 반에 70여 명 되었을 걸. 그해 6학년이 13반, 졸업생이 900여 명이었던 걸로 기억나.” 내가 다닌 공도중학교는 시골이었지만 고등학교 들어가며 서울에서는 급우가 70명이 넘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소란스러운 70여 명 계집애들을 처녀 선생님이 어떻게 감당해 내셨을까? 잘못해 선생님에게 몇 대 맞아도 본인도 부모도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아랫줄 안경 쓴 미인이 봉재언니
점심을 소담정 도메니카와 함께 하기로 했는데 부엌에 들어선 순간 머리가 쭈뼛했다. 바닥에 물기가 심상치 않아 대나무 매트를 들어보니 흥건하다. 아침에 세탁기를 돌렸는데 물이 안 빠지고 넘쳤나보다. 보스코가 내려와 세탁물을 바구니에 담아와 널면서도 그걸 눈치 채지 못했다니 남자란 정말 둔감하다. ‘손에 쥐어주지 않으면 뭘 모르는 게 남자’라는 도미니카의 남자평.
우선 넘친 물을 닦아내고 굴 비빔밥을 해서 점심을 먹고 도메니카의 진두지휘를 받으며 부엌하수구 뚫기에 돌입. 가구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4년 전에 산, 하수구 뚫는 철사를 세 번째 사용했다. 팔 아픈 내 대신 보스코가 긴 스프링 철사를 돌려 넣어가며 세탁기 배수구, 개수대 배수구 모두 실패하더니, 부엌 뒤 하수구에다 철사를 넣어가며 돌리자 기름 찌꺼기들이 흘러나오고 뜨거운 물을 한참 흘려보내자 더 이상 역류하지 않고 물이 나간다. 전순란도 그렇지만 문제가 생기면 투쟁 정신에 불타는 도메니카는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간다. 나와 말남씨처럼 싸움을 시작하면 이길 때까지 싸우는 그니가 좋다.
오후 6시 30분에 올해 마지막 느티나무독서모임. 내가 3년 전 문영심 작가의 「김재규평전」을 연말선물로 주고 이듬해에 읽자고 할 때만해도 독서회친구들이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이미 알고 있던 일이요 지나간 일이라 저항감이 적었단다. 그런데 작년 말 같은 작가의, 이석기 통진당 의원 사건을 기술한 「이카로스의 감옥」을 주고 내년에 읽자하니 거의 편치 않은 얼굴들이었다. 그래서 12월에 읽자며 제일 뒤로 밀렸고 오늘 그 책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정옥씨는, ‘정말 국가권력의 횡포가 이런가?’ 두려웠다고, 자긴 너무 몰랐다는 깨우침과 이런 책을 읽게 해준 언니가 고맙다고, ‘나 하나쯤이야’에서 ‘나 한 사람이라도’라는 생각으로 나라가 바로 서게 정치사건들을 허투루 보지 않고 바른 사람에게 투표하겠다는, 모범답안을 술회했다.
윤희씨는, 이 책을 읽게 해 줘서 고맙지만, 어찌해야 할지 혼란스럽다며, 자기가 좋아하는 유시민이나 심상정에 관해 저자가 너무 나쁘게 얘기해 가치관의 혼란이 오더란다. 희정씨는, ‘순란 언니 아니었으면 이런 책 안 읽었을 텐데, 선물해주고 독려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남북관계, 통일문제, 해방된 지 70년이 넘어도 ‘빨갱이’니 ‘종북좌파’라는 말이 기탄없이 통하는 주변에서 민족분단의 피해자가 바로 우리라는 걸 알겠더란다.
혜진씨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법정의 기본인데 당초부터 마녀사냥으로 몰고 간 언론과 박근혜 정부, 국정원 모두의 범죄행위를 알게 되었단다. 그런가 하면 ‘언론이 조작이듯, 이 책도 진실만 적었다고 생각 않는다’는 말도, ‘이 책으로 우리가 너무 좌편향으로 간 것 같다’는 서평을 내놓은 회원들도 있었다.
나는 결론 삼아, 박 정권이 선전하던 ‘내란음모는 무죄’, ‘RO는 실체 없음’, ‘내란 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라는 황당한 사법부 결론이 나온 조작 사건이다, 그동안 국정원에서 조작된 내란음모 사건이 모두 무죄였듯이 이것도 무죄다, 무고한 이들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바로 알고 인정해주는 게 양심 있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세이리라고 말해주었다.
모임을 마치고 집에 오니 밤10시가 넘었다. 가느다란 그믐달이 찬바람 속에 지리산 노장대를 비추는 새벽녘이면 저 산속으로 들어가 숱한 겨울을 떨다가 굶주림 속에 스러져간 ‘산사람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