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가톨릭프레스 독자로부터 기고된 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반론 등을 제기할 경우 언제든 게재할 방침입니다. - 편집자 주
어렸을 적 개신교에서 신앙을 시작한 이래로 생각해보면 교회 정치판에 빠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정치판’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고 일단 개신교 회중의 일원이 되면 그 자체로 투표권이 생기니 목사 오고 가고, 장로 붙이고 자르고 하는데 있어서 유권자로서 그저 우리의 현실정치마냥 오만 꼴을 다 보게 되는 그런 일상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름 신앙이 없지는 않았으니 어느 날 우리 목사의 꼬락서니를 보다 못해 요새 애들 표현대로 ‘현자타임’이 왔는데 그것이 천주교로 개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머리는 안 좋아도 생존을 위해서는 눈치가 빨라야했으니 처음 천주교에 와서 (요새 젊은이들 표현대로) 간을 보며 느낀 것은 그야말로 ‘중세의 재현’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당시 한국 천주교회는 김수환 추기경도 건재했고 나름 공동체의 순수성을 유지하며 평화로운 철인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러다보니 또 다른 답답함은 엄습해왔지만 독재에 따른 효율성과 안정성에 만족하며 그럭저럭 신자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러 큰 버팀목이신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시고 나니 그때부터 나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체제는 철인정치인데 통치자가 철인이 아닌 그냥 동네 아저씨들이라는 데서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주임 달고 온 신부가 횡포를 부리고, 교회법에는 엄연히 신자의 성사요청에 합리적 이유가 없는 한 응해야 할 것인데 당연히 베풀어야 할 성사임에도 돈이 오고가는 모습을 볼 때에도 그저 큰 형님 때문에 참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거다.
어쩌면 신부들도 큰 어르신 때문에 참았는데 이제 눈치 볼 사람도 없겠다, 참지 말자고 굳세게 마음먹던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서로 안 참으니 보잘 것 없는 인생 밑바닥 보여주는 것은 시간문제 였을까. 그렇게 나는 잠시 요나처럼 방황했다.
좋다. 하느님이자 참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후계자들을 통하여 소위 성사집행권을 비롯한 교회의 통치권을 주교-신부가 행사하는 것은 좋다. 그리고 교회를 정치판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로마시대 독재관마냥, 카이사르마냥, 아우구스투스마냥 일인 의사결정구조를 가져가는 것은 좋다. 이론적으로 일리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현실세계의 인간이 그것과 정합성이 있느냐는 점이다. 과거 우리가 못 배우고 못 먹었을 때는 로마에서 유학했다느니, 신학석사라느니 하면 무턱대고 대단해보이고 쫄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현실은 청년실업난 덕분에 종로 한복판에서 “석사~” 하면 돌아보는 사람이 한 다스 된다고 하지 않는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대부분 대학에 가서 학사가 돼서 나오는 시대에, 조금만 더 공부하면 석사가 되는 시대에, 의지와 돈만 있으면 외국유학은 그저 쉽게 가고, 유학이 아니더라도 일본은 옆 동네요 중국은 앞 동네, 필요한 자료는 구글에서 뽑아 영어로 바로 읽어 내리는 시대에 도대체 지금은 사어가 된 라틴어 좀 하고, 국내에서 인기도 없는 이탈리아어 좀 한다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인지 모르겠다.
과거 중세시대에 교회가 수사재판을 하던 시절에야 교회법 전공, 신학전공이 의미가 있었는지 몰라도 현실세계에서 당최 관련 박사를 어디에 써야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사람의 학벌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만큼 넓어지고 다양해지고 일반 신자들의 의식 수준도 꽤 높이 올라왔으니 신부들이 쓰는 잔기술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주교신부들은 성사집행기관으로서는 몰라도 현실세계에 수렴할수록 그들의 가치는 0에 수렴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철인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검정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 아닌가. 현 세계에서는 죽은.
결국 현 시대의 주교신부들은 철인이 아니니, 우리가 연애할 때 흔히 이야기하듯, ‘이것도 저것도 없으면 성격이라도 좋아야’ 하는 것처럼 현 시대의 주교신부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겸손, 겸양으로 표현되는 ‘그저 성격이라도 좋으라’는 요구일 것인데 실제 우리네 교회에서 겸손한 주교, 양 냄새나는 신부가 얼마나 되는지 나로서는 자신할 수 없다.
소위 영성으로 표현되거나 포장되는 겸손, 겸양도 0에 수렴하고 지상의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데 필요한 지적 능력, 카리스마적 리더십, 하다못해 인간적 매력마저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현 한국 천주교회. 심지어 최근에 이르러서 몇몇 교회복지재단이 문제를 일으키자 마치 당연직처럼 되어있는 주교인 재단 이사장을 일반 평사제로 바꾸어서 일종의 총알받이로 쓰자는 꼼수마저 난무하는 이 시대, 그저 병신도나 되면 다행이라고 자조하는 이 시대에 나는 왜 이런 글을 쓰는 것일까?
마지막 한 가닥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개별 본당 내 행정권과 사목권을 분리하자는 것이다. 사제들이 회계를 아는가? 법학을 아는가? 하다못해 노가다 십장 기술이라도 있어서 성당에 문제가 생기면 공구리라도 칠 수 있는가 말이다. 세상에서 죽었다는 갈라티아서 2장 20절의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비틀어 말하자면 그 바오로의 후계자들인 주교와 신부들은 정말 현실 세계에서는 ‘무쓸모’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보편교회법에서 요구하고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 지침, 전국공용교구사제 특별권한에서 요구하는 사제로서의 아주 기초적인 덕목, 즉 교회기관으로서 성무집행에만 전념하는 것이 그나마 그네들의 가치를 지키는 최소한의 보루일 것이다. 저장해놓은 몇 년 전 강론을 돌려막기하다 신자들에게 들통 나 창피해하지 말고 본인의 고유임무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나머지 성당 내부의 재정, 인사, 유지보수, 관리 등은 원래 세상에서도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 보편사제직이 맡아 그들의 탤런트를 성당 안에서도 사용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마태오 복음서에 나온 고율의 정기예금을 찾아 새마을금고를 다니시는 예수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것이 당장은 현실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안다. 엄연히 사법부의 판결로 유죄가 확정된 신부를 바로 본당에 발령 내는 교구장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한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인정한다. 한국에 있는 교황 대사는 당최 뭐하는지도 모르겠고, 가사 바티칸에 보고가 올라간들 성좌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로마의 노인네들이 철저히 방어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측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식한 말로 ‘보편사제직’, 나의 용어로 ‘병신도’로서의 권한을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몇 해 전 이런 운동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상 실패했던 것도 안다. 하지만 다시 제안한다. 과감히 성당에 들어가는 자금줄을 끊자는 것이다. 성체가 있는 한 당신이나 나나 성당에 가야하는 운명인 것 자체를 부정하지 말되 다만 주교신부들의 날이 갈수록 막나가는 행태를 막기 위해서 일종의 불매운동을 하자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어차피 교회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나 나보다 부자다. 어쩌면 교회가 최근 들어 이런저런 투자 사업에 몰두하는 것은 신자 없는 교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연예인 걱정, 재벌걱정 같은 교회걱정 하지 말고 과감히 자금을 끊자. 언제까지 병신도 취급 받으며 살텐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복은 맘몬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