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6일 화요일, 흐리고 비
촛불이 사위어간다. 방구석에 켜둔 촛불은 내내 자신을 살라 빛을 밝히고는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촛심이 힘없이 작아지다가 마지막엔 펄럭 여린 소리와 함께 끝을 냈다.
엄마를 보러 갈 적마다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져가는 가녀린 촛불을 본다. 작년에만 해도 내가 유무상통을 떠나면 마당까지 따라 내려와 나더러 차 유리문을 내리라 하고는 한 바퀴만 태워주고 가라고 장난 겸 떼를 썼다. 로마에 갔다 돌아온 10월에도 ‘아래층까지 가서 너 가는 것 보고 올라오마’ 했고 지난번만 해도 엘리베이터 앞에 놓인 의자까지는 따라 나오셨다. 그런데 오늘은 “엄마 나 가요”라고 해도 멀뚱멀뚱 바라만 보신다. 철없는 아이를 떼어 놓고 먼 길에 오르는 엄마 심정이다, 이제는 딸이.
엄마가 화장실에 가신지 한참인데 안 나온다. 들어가 보니 기저귀에 실례를 했는데 그 처리를 못해 어찌할 바를 몰라 마냥 계시는 거다. 바닥에 벽에 변기에 손에... 당신이 뭔가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욱 난감해진다
“엄마, 옛날에 나 어렸을 때 응가하면 엄마가 다 치워줬죠. 이젠 내가 해드릴 께요” 나는 엄마 옷을 전부 벗기면서 “엄마가 밥 잘 먹고 소화도 잘 시키니 응가 색깔도 예쁘네요”라고 안심을 시켜드렸다. 온몸을 깨끗이 씻기고 화장실 청소와 옷을 빨고 나오니까 엄마는 순한 애기처럼 잠들어 계시다. 새 옷을 갈아입어 몸도 맘도 편한 얼굴이다. 도우미 아줌마들이 돌봐드리지 않으면 자식이 방문할 때까지 몇날며칠이고 그러고 계셨겠지 싶어 자신들의 수고를 대신 해 주는 아줌마들(조선족)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했다.
아줌마들은 “자주 그러시는 건 아니고 한 달에 한번정도니까 너무 미안해 마셔요”라며 날 위로한다. 엄마 옆에서 자다보면 작년까지만 해도 벽을 짚고 화장실에 갔는데 이젠 엉덩이로 밀고 가거나 기어서 가는 걸로 보아 이러다 보면 다음 단계는 요양병원이구나 싶어 슬퍼진다. 원장선생님은 ‘그래도, 무릎으로 기더라도, 당신이 움직일 수 있는 한 실버타운에 계시는 게 요양병원에 가시는 것보다는 훨씬 났다’고 귀뜸하신다. 부디 올 1년이라도 이곳에 더 계실 수 있기를 바란다.
식사를 해도 밥과 국물만 먹고 이가 없어 아예 반찬은 안 드신다. 이를 해 드리려 해도 치과의사가 그 연세에는 해드릴 수가 없다고, 해드리나 마나라고 말린다. 그래도 밥은 한 그릇씩 드시고 소화는 잘 시키니 그나마 다행이다.
지리산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눈 대신 황사와 미세먼지가 가득한 비를 뿌리고, 달리는 차마다 회색 흙탕물을 뒤집어썼다. 그래도 저 높은 곳, 덕유산 골짜기엔 눈이 내리는지 동양화에서 주는 여백의 아름다움을 물안개가 채운다.
덕유산휴게소에서 엊그제 오이화씨가 페북에 올린 떡라면이 맛있어 보였던지 ‘해물짬뽕신나면’을 시켰는데 역시 내 위장은 라면과는 안 친하다. 아니, 고속도로 휴게소의 음식의 ‘무성의함’과는 별 인연이 없어 다음엔 차라리 바게트 샌드위치나 주먹밥이라도 싸 올란다.
한 달 만에 돌아온 문정리는 내리는 빗속에서도 변함없이 아름답다. 왕산 쪽을 보나 지리산쪽을 보나 눈에 익은 산자락이 ‘변함없이 당신을 기다렸다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마을회관에 잠깐 들렸더니 동네 아줌마들이 눕거니 앉거니 전원 모여 있었다. 서울서 가져온 전자레인지를 회관 마루에 설치해 드리고 그 중 제일 어린 이장댁에게 사용법을 가르쳐 주고 돌아서는데 큰 양푼에 동태가 한가득하다. 이번에 새로 뽑힌 이장(영숙씨 남동생)이 이장턱으로 사 왔단다.
휴천재에 들어서자 식당채 식탁위에 노랑 튤립이 한 병 가득 나를 맞는다. 누굴까? 이런 ‘우렁이 새악씨’ 할 사람은 사방 백리 안에 우리 귀요미 미루 하나뿐이다. 보스코가 ‘두더지잡이’에서 ‘선풍기아저씨’로, 그리고 ‘홍어아저씨’로 변신하는 모습이 안타깝다며 해독차를 두 병이나 마련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