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3일 화요일, 맑음
오늘 온다던 친구가 있어 밤에 몇 번이나 나가서 눈을 치웠다. 눈이 쌓이고 쌓인 눈은 한번 얼면 이집 안주인의 고집을 닮아 겨우 내 녹지 않을 꺼다. 5년 전, 우리 집 집사가 겨우내 눈을 치워 단감나무 밑에 쌓아 놓아 3월에 복수초가 눈을 비집고 나와 노오란 얼굴을 내밀고 나서야 감나무 밑에서는 겨울이 갔다.
그러나 추위를 못이긴 단감나무는 쌓아놓은 눈과 집사를 소리 없이 원망하면서 세상을 떴다. 해마다 천여 개를 매달던 감나무는 그래도 미련이 남았던지 뿌리 곁에서 새싹을 마련해 잔가지 몇을 피우더니 그 중 하나가 살아남아 올해 스무 개 정도의 단감을 내 주었다.
영하 15도라지만 서울의 북쪽 산자락에 있는 단독주택의 겨울은 더 춥다. 보스코는 주교회의 사무실로 김희중 대주교님을 만나러 긴 코트에 모자와 장갑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나갔는데 혹시 어제 내린 눈이 얼어 넘어지지나 않을까 오전 내내 마음 졸인 건 나였다. 나이든 사람은 무조건 눈길과 빙판을 조심해야지 겨울철 낙상하여 골반이 부서지면 그 고생이 황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 그가 정오가 되어 집에 돌아와서야 마음이 놓였다.
9시가 좀 넘어, 오늘 놀러오겠다던 실비아씨가 왔다, 정성을 싸들고. 밤늦게까지 일하고 밤잠도 못 이루는 아내에게 남편이 하는 최고의 시중이, 그니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일뿐이라는 투박하고 우직한 남자가 차로 모셔왔다, 인천서 여기까지! ‘먼 길 싸모님 모시고 오시느라 고생하셨다. 차라도 마시고 가시라’고 나가보니 벌써 자취를 감추었다. 두 여자에게 납치라도 당할까봐 두려웠나?
작고 귀여운, 그러나 당찬 여인 실비아의 허스토리를 듣노라면, 한마디로 ‘오뚜기’! 태어난 지 일곱 달에 엄마의 죽음, 아버지의 재혼, 계모의 구박, 생존하기 위해 했던 모든 투쟁이 ‘픽션 같은 논픽션’이다.
학생들은 독재타도를 외치며 최루탄을 맞고 도망가다 쓰러지는데 경찰이 던진 최루탄이 그녀가 팔던 좌판 과일 위로 하얗게 쌓이던 시절! 우리의 ‘1987’과 그니의 ‘1987’은 상황이 다르면서도 같았음이 지금은 살레시오 선교사들의 고생을 돕는데 헌신하는 그니의 삶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니는 톤즈까지도 다녀왔다.
네 번에 걸친 남편의 사업실패 앞에서도 당당했던 그니, 이정표 같은 아내가 있었기에 오늘의 남편도 있었으리라. 그니는 주방의 쿡, 서빙을 깐죽거리는 손님들과 맞짱뜨기, 저녁내 동시다발적인 비상상황을 치루고 나면 불면증으로 시달릴 만큼 파김치가 된단다. 그니가 제일 싫어하는 두 마디. 주문한 음식을 다 먹고서 술이 거나한 남자들이 서빙 아줌마에게 시비를 걸며 “사장 나오라고 해!”, 또 벌써 고주망태로 취한 사내가 비틀거리며 “아줌마, 쐬주 한 병 더!” 소주 한 병이라도 마시면 왕이 되는 안하무인 앞에 주인 인격은 ‘소주 한 병’으로 평가절하 될 경우 당당히 맞서는 단호함이 그 자그마한 몸에 넘친다.
너덧 시간 동안 정말 많은 얘기를 주고받고 점심에는 해산물 빠스타를 해먹었다. 내가 요즈음 만나는 사람들의 아픔 중에는 주로 어머니를 일찍 여읜 상처가 바닥에 깔려 있다. 보스코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신변얘기를 알아갈수록 그를 꼬옥 안아주고 싶은 모성애가 요동치는 걸 주체할 수 없었는데, 여인들에게서도 같은 아픔이 조가비 생살속의 진주처럼 영롱하게 살아있음을 감지한다. 그런 상처를 안고서도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다시 사랑하고 싶은….’ 병이라면 참 큰 병이다.
요즘 뉴스를 독차지한 이명박의 추접과 비겁과 거짓이 평범한 아낙에게도 참으로 혐오스럽다. (작년에 보스코도 글을 쓰던 다산연구소의 ‘다산포럼’에)
영화 ‘1987’에서 모든 사건의 배후인물로 등장한 김정남 선생이 쓴 글을 읽었다. 이돈명 변호사가 이부영씨를 숨겨줬다는 죄명으로 고영구 변호사 대신 8개월간 교도소를 갔다. 그 당시 교도관이던 전병용씨도 민주인사들을 숨겨 주었다고 체포되었는데 그의 최후 진술이 가슴을 울린다.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음에도 범죄자의 낙인이 찍혀 징역살이를 하는 수많은 노동자, 지식인, 민주 인사들을 만나면서 나는 부패한 독재 권력의 하수인으로 남기를 거부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의 억압과 천대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되곤 하는 저 억울한 민중의 편에 굳게 서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