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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유전무죄’ 사법부에 대한 분노
  • 전순란
  • 등록 2018-02-07 10:4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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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5일 월요일, 맑음



유전무죄! 사법부에 깊숙이 자리 잡은 기득권 세력의 뿌리를 절감하는 한 나절의 분노! 저녁 기도에서 시편을 읊었다. “악인들 위에 숯불과 유황을 퍼 부으시리니. 악인들이 아무리 꽃필지라도 우리는 그들의 종말을 알기에 낙담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내 이 눈으로 주님의 정의를 보리라”는 확신을 다짐한다, 억지로라도! 촛불들이 흔들리며 분노의 불꽃에 심지를 돋으리라. 삼성이라는 집단의 뿌리를 캐내야만 이 땅에 경제정의, 사법정의가 서나?


며칠 전부터 지하 관정수 펌프의 모터가 밤낮없이 돌아간다. 어제 밤에 진이 엄마가 물소리가 난다 해서 나가보니 보일러 보충수 통의 부레가 들어오는 물을 막지 못해서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길 위로 언덕 밑으로 빙판과 고드름이 맺혀져 있었다. 시골에 살면 그때마다 사람을 부를 수가 없어 손수 할 줄 알아야 한다. 다 할 줄 알아야 한다. 한밤중 손전등을 켜들고 길로 올라가 사다리를 딛고 넘치는 물을 손으로 퍼내고 부레를 움직여 우선 올라오는 물을 멈추게 했다. 캄캄한 밤이고 엄청 날이 추워 얼음 같은 물에서 손을 떼고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들어왔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더는 물이 넘치지 않는다. 대전엘 다녀와서 각방 배선을 잠가 가면서 에어를 빼야겠다. 이런 걱정을 하나도 안 해도 되는 보스코가 부럽기만 하다. 사실 해보려고는 한다. 그러나 그가 서툴게 손대고서 남긴 일을 뒤처리하느니 아예 일을 안 시키는게 더 실리가 있다는 게 그와 45년간 살아보고 얻은 결론이다.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 번역이나 강연은 그가 더 잘하니까 하는 거고, 오늘도 최원호 박사가 보스코를 교부학회의 전설이라고 했다. 밥하고 살림하고 고장난 것 고치는 일은 내가 더 잘하니까 내가 한다. 때로 힘들고 아쉬울 때도 있지만 억울해 할 것은 아니다.


12시에 집을 나와 대전가톨릭대학교 정하상교육회관에서 제24차 한국교부학연구회가 있어 보스코를 싣고 2시 30분에 도착했다. 오늘 발제는 분도출판사 사장이었던 허성석 신부님이 ‘렉시오 디비나’에 대해 하셨다. 가톨릭교회 안에 널리 번지고 있는 성서 읽기와 묵상이 초대교회, 교부시대부터 내려온 영성이라는 강연이었다. 


전인적인 기도법, 성경말씀에 촉감으로, 눈으로 마음으로 온몸으로 다가가 하느님과 대화하듯 단순하게 반복하고 반추하고 곱씹으란다. 허신부님의 차분하고 설득력 있는 강의가 쉽게 귀에 들어 왔다. 우리야 아침기도에서 ‘즈카리야의 노래’ 직전에 그날 미사에서 봉독될 복음을 찾아 읽는 게 전부지만 저렇게 말씀을 맛들이면 좋겠다.


20여 년간 왜관 분도수도회에서 이 학회를 개최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 좀 염치없는 기분이었는데 이번에 대전교구에서 이렇게 맞아주니 고맙다.


오늘 특히 의미 깊은 행사는 교부학연구회가 분도출판서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원천’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로 50권을 내기로 약정하고 10년간 해마다 다섯 권씩 출판하는데 그 중 첫 세 권의 책이 노성기 신부, 최원오 교수, 하성수 박사의 번역작업으로 간행된 일이다. 책이 자그맣고 양장본으로, 분도출판사 작품답게 깔끔하게 나왔다.


라틴어학자이고 중세철학을 20년 넘게 가르쳐온 보스코도 어려워 끙끙거리며 번역해내는 ‘교부총서’(보스코가 10여권 책을 냈다)는 교부학을 가르치는 학자나 배우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고(더구나 라틴어-한글 대조본이다), 우리처럼 평범한 아녀자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문고판’ 교부총서가 나온다니 이젠 신앙 있는 아줌마들 손에 핸드폰 대신 이 책이 들렸으면 좋겠다. 대구교구의 보좌주교님도 보스코도 축사를 한 마디씩 하였다.


식사 후에는 친교 시간을 가졌다. 학자들 외에도 가톨릭(수원 정하상 교부학연구회와 서강대 신학대학원 학생들), 성공회(연세대에서 공부하는 ‘비아출판사’ 종사자들, 개신교(세분, 내 한신 후배목사님들도 있었다)가 함께 모여 자기소개를 하고 교부학을 어떻게 만났는지 또 이 학문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얘기하고 이 학회에서 받은 환대에 감사하는 따스한 시간이었다.


내 옆에는 몇 년 전 김경일 원장님댁이 있는 임실에서 잠깐 들렸던 임실성당에서 만난 수녀님, 내 휴천재일기를 읽는 패친 몇 분도 만나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같은 하느님을 믿고 같은 학문과 가치관을 추구하며 공동의 관심사로 함께하는 시간은 알차고 고마운 시간이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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