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9일 금요일, 맑음
한밤중에 난방보일러 물탱크가 있는 집 뒤의 언덕을 몇 번이나 오르내렸는지 다리가 뻐근하고, 열댓 양동이를 들고 물을 퍼 나르느라 팔이 아프다. 단독주택에 살다보면 내가 못하면 남의 손을 빌려야 하는데 산속에서는 빌릴 손도 없으니 스스로 배워 익혀야 한다. 이렇게 집안일 전부에 통달하다 75세쯤에는 ‘집안일 모든 문제 해결’이라는 간판을 단 가게라도 낼 수 있겠다.
「전라도 닷컴」 1월호에 나오는 얘기. “장날이면 문턱이 닳는 화순 사평 장터 ‘광주미용실’ ‘가위손 할매’ 장금자(78세) 여사. 스물 두 살 되던 1962년에 전남도청에서 미용사 자격시험을 봤다. 고데·올린 머리가 주 종목이었다. 결과는 1등. ‘시험관이 등을 뚜듬서 됐다고 이름표를 붙여주더만’ 그날부터 60년 이 일대 할매들에게 ‘빠마를 허고 나문 10년씩 젊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할매 전문 헤어샾’. 모 방송국에서 촬영을 하고 드렸다는 모자에 새겨진 네 글자 ‘헤어 명인’이다. ‘각시 때는 오줌 눌 새도 없이 살던 할매들이 인제사 깐닥깐닥 머리 볶는 미장원 유리창엔 ‘업스타일, 드라이, 매직, 카트’”. 78세 그 나이까지 미용사 현역인데 전순란도 한 80까지 갈고 닦으며 ‘전업주부’ 현역에서 뛸란다.
지난달 남해형부의 77세 생일, 어제 생일을 맞은 임신부님. 지난 31일의 보스코의 영명 축일 세 가지를 함께 축하할 자리를 귀요미 미루가 마련했다. 남해 형부의 초청으로 미조항엘 갔다. 형부를 오라버니로 모시는 ‘삼다도’ 해녀 마담이 쑤어주는 전복죽과 소라 그리고 싱그러운 바다풀이 색깔마다 맛을 달리하는 식탁에서 미루네 부부, 봉재언니 남매, 우리 부부 여섯 명의 산사람들은 모두 행복했다. 소라를 특히 좋아하는 내가 싱싱하고 커다란 소라를 한입 무는 걸 보고 보스코가 자기 몫에서 내게 한 개를 양보한다.
젊었을 때 제주로 내려가 중문중학교 교장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제주도 중문리에서 태어나 여덟 살에 육지에 있는 덕정으로 이사 올 때까지 제주에서 살았던 전순란! 지금도 내가 모든 생선을 좋아하고 해물과 바닷나물을 좋아하는 것도 그때 익힌 입맛이리라. 보스코가 워낙 생선에 대한 애정이 적어 이렇게 밖에서라도 바다와 만나면 너무 반갑다.
식사가 끝나고 2016년 11월 26일에 갔던 ‘독일마을’ 초입에 있는 ‘쿤스트 라운지’라는 카페에 갔다. 각자가 준비해온 선물을 서로 나누고, 케이크에 주인공 한 명에 촛불 하나씩을 꽂고 축하노래를 불렀다. 어르신들이 한참 크는 애들보다 더 잘 노는 것 같아 카페 안의 젊은 세대들에 양해를 구하고, 봉재언니에게서 전봉준 장군을 노래하는 '들불'을 청해 들었다.
언니가 걸어온 가톨릭농민회 전국회장으로서는 죽창을 들고 서울을 향해 진군하는 전봉준 노래는 안도현 시인의 시 만큼이나 비장했다. 대통령만 바뀌고 변혁의 걸음이 너무 미진해 답답한 속에 그 음악은 우리 민초들이 지속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자는 결의를 다지는 노래 같았다. 4시 넘어 헤어지면서도 아쉬운 우리는 가까운 시일에 다시 만나게 되리라.
6시에 집에 오니 어제 내가 하라는 대로 소담정 도메니카가 휴천재에 올라와 혼자 TV에서 북한예술단 공연을 보고 있었다. 예능프로라고는 보는 일도 없는 우리도 ‘우리민족끼리’ 피가 끌려 우리 70년대 풍의 공연과 40년대 심파쪼 영화 같은 해설을 들어도 전혀 생소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하나임에 틀림없다. “힘든 세월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저렇게 공연을 해주니 고맙고 가여워서 눈물이 난다”는 것이 도메니카의 감상평이다.
8시부터 송승환이 총감독을 한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을 보았다. 88올림픽 등 그동안 그리도 많은 개막식과 폐막식이 방영되었을 텐데 오늘은 우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또 열심히 보면서 남북단일팀의 공동입장, 대통령의 개막선언, 김연아의 성화점화에는 박수까지 쳤으니 다 ‘우리 이니’ 덕분이다. 그동안 북한팀 참석을 놓고 그토록 야만적인 행동을 해온 일부 야당에게 “사람이 먼저 되어라”라는 자막을 보여주고 싶다, 사람이라면 형제끼리 그래서는 안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