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0일 화요일, 맑음
한목사가 전화를 해서 ‘잘 다녀오라’고 한다. 아들이 와서 혼줄을 놓았던지 ‘나 어딜 가야 하는 거야?’물으니, ‘너 여동문회 장학회에 가야 해’라는 친구 대답. 며칠 전까지 동기들에게 꼭 가자고 전화까지 해놓고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남편 앞에서 늘 ‘멀티 기능’을 자랑하는 여자도 아들 앞에서는 ‘모노 기능’으로 퇴보하고 만다.
우선 여동문회 회장에게 실수를 알리고, 집에서 한 시간이면 도착하니 늦겠다 하고, 보스코더러는 어제 먹다 남은 피자 데워서 먹으라 당부하고서 바람처럼 내달렸다. 모임 하는 장소는 예전에 자주 왔던 서대문의 ‘기장선교교육원’. 한목사가 ‘여신학자협의회’ 총무를 했을 때 자주 회합하러 오던 곳이었는데 그 장소도 까마득하고 낯설었다.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참 신비하여 어떤 곳은 자주 가던 곳이라도 아주 생소하고, 생전 처음 가는 곳도 늘 왔던 곳처럼 낯익어서 기시감(旣視感) 혹은 ‘데자뷔’(dejavu) 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꿈에서도 이상하리만치 같은 장소를 자주 가는데, 막 잠이 들 때, 깊은 잠에서, 잠이 깰 때 가는 곳이 다르다. 잠이 들 때는 ‘미처 못 한 일’을 어디선가 하고 있고, 깊은 잠에서는 숲속 맑고 작은 물웅덩이 가상자리에 꽃이 피고 물고기가 노닐고 나무 새로는 검푸른 하늘이 보여 ‘참 좋다’가 절로 나온다. 잠이 깰 무렵엔 ‘뭔가 해야 하는데’ 준비가 덜 돼 쩔쩔매거나 차를 놓치거나 뭔가 잃어버리고 당황하다 깜짝 놀라 깨서는 ‘휴~ 꿈이어서 다행이다’ 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은 맨 정신에 약속을 잊고 가던 곳이 생경했으니 ‘전순란도 한물갔구나’ 탄식할밖에…
내가 도착했을 때는 모든 순서가 끝나고 “그땐 그랬지: 한신에서의 추억 나누기”를 하고 있었다. 여동문들이 거의 한신에서 배우자를 만나고, 하느님이 사랑이시어서 서로들 사랑해선지 우리 ‘엠마누엘동산’에서 만난 커플은 목사 사모나 목사가 되어 지금도 잘 살고 있다는 결론, 전순란만 빼고! 나는 엠마누엘 동산 아닌 혜화동 낙산에서 신랑감을 찾아냈으니까. 모임에 참석한 여동문 거의가 내 일기를 읽는 독자들이어서 내 모든 일상에 ‘기시감’ 내지 ‘데자뷔’를 갖추고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하기야 내 옆에 앉았던 안수경 후배도 안병무 박사님에게서 ‘더 이상 십자가를 세우지 말고 십자가를 해방시키는 일을 하라’는 명을 받아 절대로 목사 사모나 교회목회를 안 하기로 결심하여 지금은 강남지역 자활센터장을 하고 있다.
우리 모두의 공통점은 ‘수유리 캠퍼스의 행복한 추억’을 공유하고 끈끈한 유대감을 갖고 있다는 거다. 식사를 하면서도 차를 마시면서도 갓 스물의 시절로 돌아가 많이 떠들고 많이 웃었다. 거리에서도 시장 길에서도 옛날처럼….
살아가면서 많은 것이 묻혀지고 잊혀진다 하더라도
그대 이름만은 내 가슴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언젠가 내가 바람 편에라도 그대를 만나보고 싶은 까닭이다.
살아가면서 덮어두고 지워야 할 일이 많이 있겠지만
그대와의 사랑, 그 추억만은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까닭이다. (이해인, “인연의 잎사귀”)
빵고가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 달라 부탁해서 동사무소엘 들렀다. 빵고와 내가 아직도 가족인가 걱정도 됐는데 돌아가신 시부모님(‘성홍기’ ‘김도곡’), 남편 성염, 두 아들 성하은과 성하윤은 서류상으로 여전히 가족관계였다. 그런데 빵고의 ‘초본’에 나온 거주지는 무려 22번이나 옮겨다녔다고 올라있다. 수도자 중에서도 살레시안은 분명 ‘도시 유목민’이다.
등본을 한참 들여다보던 동사무소 여직원이 묻는다. “왜 이렇게 동거인이 많아요? 공동 주거 시설이예요?” “예, 난민수용소예요.” “???” “포로수용소라는 거 아세요? 아님 교도소?” 아가씨는 내 농담을 못 알아들어 고개를 갸우뚱한다. 어쩌다 하느님께 사로잡혀 포로 된 사람들의 종신 교도소… 내 보기엔 그게 바로 수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