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8일 목요일, 밤새 내린 함박눈
언제부턴가 보스코는 11시에 자러가고 나는 1시가 넘어서 잔다. 그 시각까지 깨어 있으려고 오후 늦게 커피를 마신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무슨 일인가 하고, 일기를 쓰고 나면 11시가 넘는데 그때부터는 바람만 집 뒤꼍에 매단 풍경을 간혹 흔들어댈 뿐 완전한 고요가 이 산골짜기를 채운다.
그 시각엔 주로 시집이나 소설을 읽는데 그 달콤함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다. 그러다보니 늦게 잠든 아내의 단잠을 안 깨우려고 4시반쯤 보스코는 살금살금 발끝 걸음으로 서재로 나간다. 그런데 오늘 아침 따라 내가 눈을 감고 잠든 침실 커튼을 소리나게 젖히고 카메라를 손에 들고 부산하게 오간다.
평소에 없던 일이라 눈을 번쩍 떴다.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그러고서 커튼이 젖혀진 창밖을 내다보니 ‘정말, 큰일났다!’ 하느님이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다. 온 세상을 하얀 솜이불로 포근히 덮어 주시지 않았나! 아직도 싸리눈이 하얗게 내리는 중이었다.
묵음으로 해둔 핸폰을 풀자 ‘카카오토크!’가 연달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그만 자고 세상구경 좀 해요!’라는 아우성이다. 느티나무 독서회 사랑스런 아우님들이 자기 집 창밖이나 이웃 지붕, 멀리 상림숲을 하얗게 덮은 백설의 세계를 아낌없이 나눠주고 있다. 마치 눈을 뭉쳐 신나게 던지며 눈싸움하는 정경이다. 나도 휴천재의 설경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었다. 행복한 아침이다. 아쉬운 건 날씨가 너무 풀려 마당이 질퍽하게 녹아가는 중이어서, 보스코가 늘 그리는 ‘나니 하트’는 볼 수 없었다.
이런 날은 누구라도 불러 모아 설경을 함께 감상하거나, 하루 종일 아무도 오갈 수 없게 고립된 세계에서 따뜻한 차를 나누며 얘기를 나눌 사람을 찾게 된다. 이 좋은 날 홀로 있는 소담정 도메니카를 불러 함께 점심을 했다. 그녀도 혼자여서 이 낭만을 나눌 친구가 필요한 터라, 우리집에 올라와서는 밥도 먹기 전에, 대북특사단의 놀라운 소득, 문대통령의 기대 이상의 능력에 대한 찬탄으로 이미 배가 두둑이 불러 있었다.
오늘이 3·8 ‘여성의 날’이어서 미투에 대한 얘기도 빠질 수 없는 요즘의 주제. 그니도 간호사로서 살아오며 마초 의사들에게 겪은 기막힌 일화들도 들려주었다. 요즘 정치인들 그동안의 손버릇 땜에 얼마나 마음들 졸이고 있을까? 이젠 ‘딸 단속’이 아니라 ‘아들 단속’을 잘해야 할 시대가 왔다.
‘문정리의 미투’도 기억났다. 어느 해 어느 날인가 이웃집 아줌마가 어두운 얼굴로 나를 찾아왔었다. 이웃 여자가 자기 집에 쳐들어온단다.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데 ‘이우제서 일하던 임자 남편이 와서 내 손목을 잡았다!’ 남편은 ‘혼자된 친구 아내가 안쓰러워 힘내라고 손을 잡아 줬다’는 변명이지만, 그 여자는 ‘그 일로 가슴이 벌렁거리고 열이 나서 못 살겠다’, ‘보약 해내라’고 저녁마다 찾아온단다.
‘이 일을 우짜면 좋노?’라는 상담에 ‘잘못했구먼, 아저씨가. 한약 한제면 싸게 치는 거니까 약 한제 퍼뜩 해다 주이소. 미안하다고 아저씨 대신 싹싹 빌고…’ 이듬해 가을 아저씨가 경운기 사고로 갑자기 죽으면서 그 미투는 사람들 입에서 사라졌고, 희미한 기억으로만 흰머리 아짐들 머리에 ‘가난한 사랑 얘기’ 한 가닥으로 간직될 게다.
오후에는 넉 달이나 못 만나본 체칠리아를 보러 법화산쪽으로 올라갔다. 도정마을은 우리 동네보다 고도가 높으니까 아직 눈이 남아 있겠지 했지만 말 그대로 ‘봄눈 녹듯이’ 다 녹아서 한길은 개울을 이루어 철철 흐르고 있었다. 스.선생네 ‘솔바위’의 새벽녘, 소나무들을 뚝뚝 부러뜨리던 눈마저도 거의 녹아 없어졌다.
남과 북 사이에 얼어붙은 겨울눈도 이렇게 싹 녹아내리면 얼마나 좋겠으며, 한반도에 전쟁나라고 고사지내는 자유당이나 꼴통들도 오늘 눈처럼 녹아서 국민들 눈앞에서 영영 자취를 감추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