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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봄비 오는 날의 수채화
  • 전순란
  • 등록 2018-04-06 10:41:40
  • 수정 2018-04-06 10: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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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5일 목요일, 비


그 찬란하던 봄꽃들이 밤새내린 비에 젖어 무거워진 얼굴을 땅에 묻고 있다. 모처럼 다가온 ‘남북한의 봄날’에도 끊임없이 비를 퍼붓는, 오늘 같은 가랑비만 아니라 우박에 천둥 번개를 쏟아 붓는 집단들도 있다. 그러나… 꽃이 져도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는 까닭은, 꽃이 져야 잎이 나고 꽃눈 자리에 열매가 맺히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종북들만 북한과 평화공존에 열광하고 나머지 국민은 관심 없다’고 떠드는 정당과 그 지지자들, 전 세계의 잔치가 된 평창올림픽을 ‘평양올림픽’이라며 난리 치다가 판문점 가는 길바닥에서 노숙하는 추태를 부리는 저 낡고 늙은 사람들… 요즘 쓰레기대란에 빗대어 한반도를 오염시키는 폐기물 같은 악취가 느껴진다. 역겹다.


10시쯤 호연이가 전화를 했다. 서진준데 안의에 가서 물건을 싣고 의왕까지 가려는 길에 ‘누나네 집이 쪼오기 보여서’ 전화를 한다고… 내 귀여운 막내 얼굴이라도 보고 점심이라도 사 먹이고 싶어 물건을 받는다는 그 공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안의 농협 양파가공공장’에 내가 먼저 도착하여 주인을 찾아 기웃거렸다. 사방에는 양파가 그득그득한데 사람들은 어디에도 안 보인다. 건물을 죽 돌며 기웃거리자 한쪽에 작업실이 있고 그 안에 십여 명이 모여 양파 까기 작업을 한다. 모두 동남아 사람들로 보이는데 양파를 까고 씻고 컴프레셔로 말려 20kg 짜리 비닐봉지에 담는 작업. 참 깨끗하게 손질을 한 저걸 어디 가져가나 물어보니 햄버거 공장에 보내져 다져서 쓴단다.


깨끗이 손질하면 돈도 더 받고 쓰레기량도 줄어들게다. 요즘은 내 생각이 모두 ‘쓰레기 처리’로 이어진다. 오후에 실어 보내려 대형트럭을 불렀는데, 서울에서 물량이 떨어져 작업자들이 놀고 있어 우선 호연이 택배트럭으로 2톤을 급히 실어 보내야 한단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다고, 빨리 배달해 달라는 재촉. 누나인 나로서는 안쓰러워 우리 막내만 쳐다보는데 걔는 “네, 배달하고 나서 점심은 먹겠습니다.” 선선히 대답을 한다. 갖다 넘기려면 두시나 넘어야겠단다. 어려서부터 내게는 늘 ‘땅꼬마 청춘’인데 이젠 함께 늙어간다.




그렇게 겨우 5분 얼굴 본 동생은 밥도 못 먹고 트럭을 몰고 그냥 떠났다. 집에 있는 작년 농사 양파가 다 싹이 났다는 생각에 한 망을 사기로 했다. 양파 값을 주니 ‘동생과 식사할 시간도 못 드려 미안타’고 돈을 안 받겠단다. 하, 동생도 보고 양파도 얻었으니 임도 보고 뽕도 땄다 위로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소담정 도메니카와 김치죽을 점심으로 먹으며 창밖으로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내다보고 있자니 드물댁이 올라왔다, 한남 보건소 소장님이 보냈다는 울릉도 전호나물을 갖고서. 난생 처음 보는 나물인데 시식을 해보니 나쁘지는 않다. 봄에는 손만 부지런하면 반찬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단, 아무리 나물이 지천에 깔렸어도 내가 밥그릇 들고 나선다고 반찬이 되어 담기지는 않는다.



오후에는 미루가 함양 지곡 정여창 고택엘 갔다가 보스코의 건강이 염려되어 잠깐 들렀다. 울릉도에서 보내왔다는 귀한 섬나물도 나눠주고 갔다. 비 내리는 오후에 깜짝깜짝 등장하는 반가운 이웃들이 있어 산속 생활은 더 풍요롭다.


오늘 온다던 체칠리아를 종일 기다리던 참, 오후 늦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폐렴기가 있어 항생제를 먹는데 일주일 치 용량을 몰라 이틀에 다 먹었더니만 간에 탈이 난 듯 죽을 지경이란다. 큰 수술을 하고 난 뒤라 걱정스러워 소담정에 전화하라 했고, 도메니카가 달려갔다. 가보니 간이 해독을 못해 까무러치기 직전! 기를 주어 해독을 시키면서 그니에게 기도를 해주고 독기를 자기 몸에 받아내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밤에는 도메니카도 쓰러지기 직전이었단다.


소담정에서 올려다 보이는 휴천재 불빛에 ‘저기라도 가면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집으로 올라 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니의 손에 뜨거운 찻잔을 들려주고 요기도 시키고 ‘봄이 온다’는 평양 공연도 함께 보며 두어 시간 지나자 그니가 생기를 되찾았다. 산속에 살면 사람이 귀하고, 서로의 기운을 주고받으며, 혼자서는 세상을 못 산다는 이치를 배우니 이웃이 모두 학교고 선생이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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