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7일 토요일, 눈, 비 그리고 바람
어제 꽃이 눈처럼 내린다 했는데, 날씨가 내 말을 엿들었는지 이번엔 눈이 꽃잎처럼 내려쌓였다. 바람도 어찌나 심하게 부는지 오늘 아침에도 휴천재 좌우 능선 솔숲이 성난 짐승떼처럼 울부짖었다. 4월 눈보라 속에 휴천재를 나서며 ‘창녕성씨 자사공파 문효공’ 집안의 시제를 지내는 호남땅 장성은 더 남쪽이니까 좀 따스하길 기대했지만 허사였다. 오늘은 종일 죽은 이들을 찾아다녔다, 일 년에 한번 하는 방문이지만.
장성 선산에서는 ‘산이 좋아 산이 된’ 조상들이 15대부터 25대까지 누워계신다. 시제는 갈수록 간소화된다. 삼서 유평리 ‘관음산’ 발치에 해당하는 선산 꼭대기 왼쪽 귀퉁이에 산신령 제상이 있어 맨 먼저 제수를 차려 올리고 절을 한다. 그 제상엔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돼지머리가 반드시 올라간다. 나는 시제 때마다 저 돼지머리의 행방이 궁금하다.
그 다음에는 창녕성씨 15대손이 되시는 ‘청학당(靑鶴堂) 진명(震明)’ 어르신 내외가 첫상을 받으신다. 종손인 강제 조카님이 제문을 읽고 모든 사내붙이들이 절을 한다. 이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다들 딴 집으로 시집가서 없고, 이 집안으로 시집온 여자들은 멀찌감치서 제수를 마련할 따름이다(심지어 제상 차리는 일도 남자들만의 몫이다).
그 다음 세대부터 25대까지는 (내가 시집 와서 처음 참석했을 적에는 일일이 제상을 받으셨고 그래서 아침에 시작한 시제가 오후도 한참 기울어야 끝났는데) 다 같이 한 상을 받으신다! 조상 열한 분(내외로 앉으시니 스물두 분!)이 한 상에 반찬과 흰밥과 국을 나란히 놓고 ‘한 술씩 뜨시는’ 풍경이라니!
조상들이 상을 물린 음식으로 후손들이 잔치를 하는데 오늘은 워낙 눈, 비, 바람이 번갈아 몰아쳐 산 아래 강제 조카님네 집으로 내려와 사과 창고 바닥에 임시식탁을 마련해야 했다. 선산에 올 적마다 제일 먼저 와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고, 재작년에 우리 집안의 유골묘를 만드는데도 혼자서 도맡았던 준이서방님 자리가 비어 그가 서고 앉던 자리마다 눈길이 갔다.
시제를 마치고 훈이 서방님네와 우리는 광주로 가서 어머님이 계신 방림동 산소에 갔다. 그 공동묘지가 방림교회 교육관 신축부지로 바뀐 지 30년이 넘어 모든 망자들이 동그란 이불을 걷고 떠나간 자리에 어머니 봉분만 60년 전의 잠자리로 친정이 있던 월산을 향해 누워 계신다.
본격적으로 개토작업을 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우리가 이장을 않고 버티는 까닭은 어머님이 멀리 주월동 친정을 건너다보시던 자리여서다. 버림받은 딸이 애달파 친정 마을이라도 눈에 담으라고 능선에서 살짝 묫자리를 비틀어 친정집을 향하게 해 준 오라버니들의 정성이었다. 하지만 머잖아 엄니도 60년 만에 이불을 개고 장성 선산의 집안 합동유골묘로 자리를 옮기실 게다. 한 달 전 작은아들 준이도 저승에서 만나셨을 테니 한결 덜 외로우실 게다.
지난번 장례날 차마 화장장까지는 못 따라간 준이서방님의 유골이 안치된, 용전 영락공원묘지엘 갔다. 망월동 묘지와 가까이 있어 앞으로도 자주 찾아갈 게다. 안치실 앞에서 ‘위령기도’를 바치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이승과 저승이 이렇게 지척인데 간다온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서둘러 떠나버린…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훈이 서방님은 형 없는 서러움에 지금도 말만 나오면 눈물을 쏟는다. 특히 20여 년 전 교통사고 후 그 시숙을 각별히 돌봐야했던 막내동서도 눈물바람이다.
함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담양에 있는 ‘성삼의 딸’ 수녀님 댁에 잠깐 들러 차를 마시며 새로 들어온 수녀님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부활절을 맞은 수녀님들의 해맑은 웃음으로 많은 위안을 얻었다.
7시 30분 함양성당 저녁미사에 문정공소 신자들이 참석해서 4월 1일 돌아가신 헤드빅 수녀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하였다.
우리 모두의 삶이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천상병, ‘새’) 한 마리 새울음이지만 떠나는 길을 짤따란 기도로 보내드리는 일은 보람이 있다. 삶과 죽음은 지척이고 죽은 이들과 질기게 이어진 인연이어서지만 우리 부부만 해도 ‘남은 날이 적어’ 문턱을 이미 절반은 저리로 넘어선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