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5일 일요일, 맑음
빵기랑 9시 미사에 함께 갔다. 가는 길 골목길에 벽에 붙여 만든 ‘동네 한 평 공원’에 돌봐주는 이도 없고 올 겨울은 유난스레 추웠는데도 들국화랑 수국, 찔레가 어렵사리 몸을 추스르고 일으켜 세우는 중이다. 참 메마른 사람들이다. 내 담벼락에 붙은 화단인데도 구청에서 만들었다고 물 한 번 주는 일 없고 풀을 뽑는 일조차 없으니 가지치기를 기대할 수 있겠나! ‘살기가 폭폭 하니 어디 눈 돌릴 여유라도 있을까?’만 속으로 원망하다 나무라다 구시렁거리다 말았다.
어린이 미사는 애들이 떠들고 어수선해도 생동감이 넘친다. 빵기도 두고 온 아이들 생각에 이 미사에 오는 게 즐겁단다. 빵기는 태어나서부터 목소리가 유난히 컸는데 오늘도 성가를 부를 때 주변 3m의 교우들이 죄다 쳐다볼 만큼 큰소리를 낸다. 우리 성당에서 젤로 목청 큰 성용이마저 ‘화통을 삶아 먹은’ 빵기의 목청에 놀라 바라본다. 작은손주 시우도 성당 가면 악다구니로 성가를 부른다니 아범 목청을 닮은 게 틀림없다.
‘우렁찬 우리 손주 목청’에 흐뭇한 할머니
이 미사에서 나를 웃기는 사람들에는 꼬마들뿐만 아니라 제단위의 사제도 낀다. 얼굴만한 제병으로 얼굴을 가리고 애들과 눈을 맞추며 시시로 ‘까꿍!’을 한다. 강론 중에 당신이 고해실에서 나오는데 “신부님이세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어 어안이 벙벙하더라면서도 “내가 신부 맞나?” 물었단다. 식사 전 기도도 안하고 수저를 물었다가 성호를 긋고는 ‘나 신부 맞나?’ 묻는다는 고백.
우리 성당 ‘평화의 인사’
미사 끝 공지시간에는 핸드폰을 열어 ‘천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세월호 노래도 틀어줬다. 신자들의 기도에 세월호 추모기도가 나오기에 자기도 생각이 나서 그 노래를 들려주노라는 말에는 솔직함이 묻어난다.
과연 진도 앞 바다에 떠도는 천 개의 바람이 지난 4년간 이 나라 국민의 가슴과 정치를 홀랑 뒤집어 놓았지만 오늘도 여전히 가슴이 먹먹하다. 더구나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꼴보수들과 그 파렴치를 가르치는 언론들의 행태에는 평범한 아낙으로서도 분노가 끓어오른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개의 바람, 천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임형주,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어제 빵기가 돈을 30만원 찾아와 빵고 10만원, 나 10만원을 나눠 주었는데 어디다 놓았는지 못 찾겠다. ‘집안에서 돈을 습득하면 당국(전순란)에 신고하고 불법으로 챙겨 사후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식구들(보스코)에게 공지했지만... 이탈리아에서 어느 노사제가 돌아가셔서 쟌카를로 신부님이 뒤처리를 해드리는데 구두 속, 서랍 속, 책갈피, 호주머니 등 온갖 구석에 돈을 꼬불쳐 놓아 남사스럽더라는 얘기가 떠오른다(물론 치매환자였지만). 이러다간 내가 죽어도 누군가 우리 집에서 잃어버린 돈 보물찾기를 하면 쏠쏠하겠다.
오후에는 친구를 만나러 나간다면서 열 번쯤 1, 2층을 오르내리며 그때마다 ‘다녀오겠습니다’를 반복하는 빵기. “니 엄마가 한번 외출하려면 ‘여보, 나 갔다올게’를 열 번쯤 하는데 어쩌면 그리도 똑같니?” 감탄하는 보스코. 대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얼마 안 있어 전화가 울린다.
“엄마, 한길에서 덕성여대 담에 붙은 집 있죠? 정원이 예쁘고 커다란 성모님이 서계시던 집 말예요. 그 성모님이 어딜 가셨어요?” “마실 나가셨나 보다.” “태풍에 쓰러져 세 토막이 나신 건 아니구요?” “집이 팔렸겠지. 새로 이사 온 사람은 교우가 아닐 테고.” 모자간 전화를 엿듣던 보스코, ‘동네방네 궁금한 걸 못 참는 건 꼭 전순란’ 하는 표정이다.
서강대 입학식 강당에 모인 수천 명 입학생 중에서도, 훈련소 연병장의 빡빡머리 수천 명 훈련병 중에서도, 국제회의 석상을 가득 메운 까망 하양 노랑 얼굴들 가운데서도 내 눈에만은 확 눈에 들어오는 내 아들! 내 새끼는 이렇게나 끈끈하게 아직도 탯줄로 이어져 있어선지 이 밤도 자정 넘어 돌아오는 아들(마흔다섯 살)을 기다리는 이 따스함과 흐뭇함을 어미로서 어떻게 주체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