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8일 화요일, 맑음
많은 이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올바른 어버이로 살라고. 자식이야 어버이날이라고 전화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해오는데 그런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나를 돌아보게 된다. 어제 지하철에서 ‘꽃바구니 택배’하는 아저씨 곁에 앉았다. 얼굴이나 차림과 안 어울리는 화려한 꽃바구니를 얌전히 안고 있었다. 어떤 회사에서 직원 생일에 보내는 꽃바구니란다. 공짜 선물인데도 맘에 안 든다고 퇴짜를 놓고 새로 가져오라는 갑질 때문에 두 번 가는 길이란다.
하루에 서너 개 꽃바구니를 배달하는데 한 개에 8000원을 받는단다. 5월은 ‘가정의 달’이라 일이 많고, 7~8월은 비수기며, 11~12월은 너무 바빠 하루에 9개까지 배달 요청이 들어오곤 한단다. 그런 날은 ‘집사람’과 딸까지 아빠의 아르바이트에 동원하고 심지어 딸의 차로 꽃바구니를 나르기도 한단다. 그렇게 번 돈은 어디다 쓰냐니까 큰딸 손녀 쌍꺼풀 하는데 100만원, 막내딸 애 낳을 때 100만원, 둘째 유럽 여행갈 때 100만원 주고…
그 순간 아저씨에게 핸드폰이 울린다. 들려오는 소리로 짐작컨대 작은딸이 수박 사오고 20만원 가져왔다는 얘기고 그 소식에 아저씨 얼굴에 퍼지는 흐뭇한 미소가 나까지 즐겁게 한다. 폰에 있는 작은딸 웨딩사진을 자랑스레 보여준다. “엄청 예쁘네요”라는 내 인사말에 딸 자랑이 마악 시작하는데 ‘강변역’이어서 내가 내려야 했다. ‘배 주고 속 빌어먹는’ 처지이지만 배속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게 부모의 마음.
오늘은 어버이날이라며 배는 이미 내 새끼들에게 내어줘 먹이고, 먹다 남은 속이라도 엄마에게 드리려고, ‘어머님의 은혜는 가이없어라’라도 불러 드리려고 아침내 전화를 했지만 엄마는 대답이 없다. 속이 타서 호천이에게 물으니 자기도 서너 번 전화를 드리다 포기했단다. ‘엄마가 그렇게나 싸돌아다니신다’는 반가운 탄식…
어제 일산교회 50주년 행사에서 오빠는 많이도 울었다. 무슨 회한이 저리 오빠를 울렸을까? 문산에서 돌아오는 전철에서 나는 다정하게 오빠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어린 시절 격의 없던 때로 돌아가 오빠의 속마음에 노크를 해 보았다.
오빠의 아픈 손가락인 외아들을 두고도 ‘받아서 견디라고 하느님이 주신 업(業)’이라고, 영동백화점 아들은 하버드를 나오고 엄청 부자고 잘나고 멋진 놈인데 아버지를 죽이고 불을 질렀지만 자기 아들은 빌어먹지 않고 도둑질 않고 자유롭게 맘 편히 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하느님 땡큐’라고, 다른 여동생에게 그동안 속이 많이 상했던지 ‘걔 또한 두고 보고, 참고 견딜 자기의 운명’이었다고 실토한다. ‘너도 재수가 좋아 좋은 아이들 배급받아 수월하게 키운 거다. 인생 짧고 그렇게 기뻐할 이유도 그렇게 절망할 이유도 없다’는 도사다운 얘기를 들으며 오빠에게 고통스러운 세월이 참 길었구나 마음이 아렸다.
화전을 지나며 전철 창밖을 내다보니 어릴 적 우리가 고기 잡으러 다니던 ‘접개다리’(우리는 그 당시에도 하도 물이 너무 더러워 ‘똥물다리’라고 불렀다) 위를 기차가 달리고 있었다. 지금도 “엄마, 내가 누구야?” 물으면 “접개다리 밑에서 주워온 여자아이”라고 대답하시는 바로 그 다리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메리인카운트의 다리’는 아니어도 아련한 추억이 흐르는 다리다. 세월의 다리를 건너고 나면 돌아올 수 없는 추억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면서도 왜 그리 아름답기만 한 걸까?
점심엔 소담정 도메니카가 산청한의학박물관에 있는 한방식당으로 우리를 데려가 어버이날을 축하한다며 점심을 사주고 그 동네 꽃구경 산구경도 시켜줬다. 4시에 광주로 차를 몰아 6시30분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렌트카를 몰고 공항에 마중 나온 빵고 신부가 우리를 ‘이시돌 목장’으로 데려갔다. 부모 온다고 우리 아들이 요리한 ‘능이버섯 삼계탕’을 저녁으로 먹었다. 오늘 오는 우리를 대접한다고 이미 예행연습을 해서 아주 성공적인 식탁이 되었단다.
함께 계신 오윤택 신부님의 구수한 이야기에 밤이 깊은 줄도 몰랐는데 내일 새벽 미사엘 가야 한다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작은아들이 묵는 아파트로 내려오는 길, 제주섬 하늘에 빛나는 별이 유난히 밝고 맑았다. 큰아들네에서, 서울집 전직집사들한테서, 엘리들과 다정한 지인들에게서 한껏 ‘어버이 축하’를 받고 작은아들 곁에서 잠드는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