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휴천재일기] “전에는 무소속으로 떨어졌고, 지난번엔 민주당 공천으로 떨어졌는데…”
  • 전순란
  • 등록 2018-06-01 10:36:01

기사수정


2018년 5월 31일 목요일, 맑음



그니는 발가락이 반쯤 삐져나온 슬리퍼를 신고 대나무 잔가지를 꺾어 불을 지피고 있다. 산에서 막 꺾어온 고사리가 바구니에 담겨 있고 커다란 무쇠솥에선 물이 끓기 시작한다. 아궁이 속에서 타던 대나무 매듭이 ‘타닥!’ 소리를 낼 때마다 나마저 깜짝 놀라곤 한다.


어제 보스코랑 읍내 나가는 길에 보니 목현마을 면사무소 옆에서 족히 열 명은 되는 할매들이 한길가 화단의 꽃밭을 매고 있었고 드물댁도 끼어 있었다. 시골 노인들에게 공공근로를 시키고 일당을 주어 생활비를 보조하는 방식이다. 도시락들을 싸와서 나눠먹는다는데 자기 ‘벤또’에는 싸갈 반찬이 없어 묵은지나 상추 된장을 싸간다는 드물댁. 어쩌다 끼니 때 그 집 부엌을 들여다보면 양은쟁반에 밥 한 공기, 찬 하나가 전부. 내일엔 계란이라도 부쳐 도시락 찬으로 싸가라고 계란 꾸러미를 내밀자 얼굴을 붉히며 미안해한다.


시골에서 혼자 사는 아짐들은 정말 오로지 생존을 위해 밥을 넘긴다. “열무김치 담글 때면 임 생각이 절로 난다”는 가락처럼 찬거리를 마련하는 것은 영감이 살았을 적, 애들이 슬하에 있을 적 일이고 ‘미망인(未亡人)’으로 혼자 남으면 뙤약볕에서 일하다 밭에서 따들고 들어온 풋고추를 강된장에 찍어 찬물에 만 밥과 함께 넘기는 게 고작이다. 밥이야 전기밥솥에 한가득 해 둬 쉴 때까지 이틀이고 사흘이고 먹고… 아아, 여인은, 어미는 무엇 하나 자기를 위해서 따로 마련하지 못하는 까닭이 무얼까?


물까치가 능소화 덤불에 지은 둥지 



휴천재 문간 아치로 올라간 능소화 덤불에 물까치가 둥지를 틀어 봄 내 부부새가 드나들며 먹이를 날랐다. 오늘 드디어 새끼 네 마리가 팔랑거리는 날갯짓으로 지붕위로 날아 나와 어미새 가르침대로 비행연습을 하고 있다. 물까치는 이 산골 제일가는 깡패여서 얄밉기도 하지만 길냥이한테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아 대견하기도 하다.


식당채 바닥에 ‘길게 앉아’ 책을 보는데, 공식선거운동 첫날답게 이 산골마을 외딴집까지도 호별방문이 이어진다. 먼저 온 후보의 푸념. “전에는 무소속으로 나와 떨어졌고, 지난번엔 민주당 공천 받은 탓으로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한국당 공천을 받아서 또 떨어질 판이니, 내 팔자는 왜 이리도 꼬이기만 하는가 모르겄소!” 시골에서는 당적이 별거 없고 ‘이당이나 저당이나 거기서 거기’니 굳이 따질 것 없이 한 표 찍어 달라는 호소다. 제주에서처럼 동일인이 이 당 저 당 무소속을 오가며 등판하니 정당정치의 정체가 뭔지 모르겠다.


매실도 딱 따기 좋은 요즘…



전화를 받고 있는데 휴천재 마당에 또 한 남정이 들어와 집안을 기웃거린다. 이번에 민주당 비례대표로 나간 군의원 후보의 남편이란다. 당분간 연가를 내고 아내의 선거운동에 나서기로 했다면서 한 표를 부탁한다. 정치를 하면 남편을 돕느라 아내만 고생하는 게 아니라 아내를 돕느라 남편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 같다.


저녁 식탁을 마주한 보스코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 하도 그윽해선지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여보, 고마워. 손학규처럼 안돼서…” 보스코가 서강대에 있을 때에 대학 내 성명서나 서명운동에 늘 손 교수가 앞장섰다는데 이젠 ‘손학규 징크스’까지 생길만큼 망가진 모습이 안타깝다. 요즘 시국이 편해선지, 모든 것에서 달관한 듯한 보스코가 참 편해서 좋다. 김영철 뉴욕행 뉴스도, 폼페이오와의 회담 뉴스도 느긋한 얼굴로 지켜본다. 


박준 시인의 ‘절’이라는 글에 나오는 한 대목. 경상도 산골에 유난히 노승들이 많이 사는 절이 있더란다. 승복을 입지 않은 스님, 새벽 예불에도 참석 않는 스님, 공양시간도 맘대로… 아무래도 이상해 주지스님에게 물으니, 그곳에선 예불, 참선, 독경 등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하더란다. 배고플 때 먹고, 고단할 때 몸 뉘이고, 졸음이 올 때 잠들고… 이게 해탈의 경지 아니고 무언가? 


인천 사는 친구와 전화를 했다. 워낙 고단한 삶을 사는 친구이기에 몸도 쉴 겸 휴천재를 다녀가라 했다. 그리 힘든 중에 ‘이시돌 숨비소리’를 돕는데 크게 손을 썼다는 소문이 있어 ‘당신의 고생을 알고 있으니 제발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그니의 한마디가 싸하게 가슴을 훑는다. “이렇게 힘들게 번 돈 좋은 곳에라도 써야죠. 그렇지 않으면 저 억울해서 못 살아요” “……”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