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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가르침 6 (유대칠)
  • 유대칠
  • 등록 2015-06-10 10:40:36
  • 수정 2015-06-10 22: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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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가 있다. 그냥 남 탓이라 돌리는 것이 편할 때가 있다. 조금의 죄책감보다 그것이 편할 때가 있다. 참 이기적일 때가 있다. 먹먹한 풍경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있었다. 한 손엔 이불로 쓸 종이 상자를 꼭 잡고, 그렇게 버려진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어디에서 주워 입었는지, 바지는 너무 길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윗옷은 여성용이었다. 그렇게 서서 음식물쓰레기로 버려진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먹먹했다. 처음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고, 그 역겨운 것을 먹기 시작했을 때, 그 마음은 어떠했을까? 먹먹해졌다. 가까이 다가가 보기도 힘든 것을 먹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그냥 게으른 인간이라고, 도와줄 필요 없는 게으르고 나태한 패배자라고 말할지 모른다. 참 잔인하단 생각이 든다. 그가 그 구역질나는 것을 먹는 동안 우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우리 신앙이 참으로 게을렀는지 모르겠다.


위안부 할머님을 보자. 그분들은 가난했다. 그때도 부유한 이들은 친일을 하며, 지금과 마찬가지로 잘 살았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하지만 가난한 할머님들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을 당하며, 살아오셨고, 지금도 그렇게 싸우고 있다. 그 아픔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이다. 그 동안 우리 신앙은 무엇을 했을까?


심지어 그분들을 향하여 담아낼 수 없는 모욕을 하는 이들이 있다. 약자에게 잔인하다. 돈 없고 사회적 모순 속에 아파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잔인하다. 할머니가 그렇게 아파 할 때, 우린 무얼 했을까? 우리 신앙이 게을렀다.


확실하지도 않은 의학적 지식에 따른 것이라며, 한센병 환자를 강제로 불임 수술을 시키는 사회였다. 그 가운데 고통스럽게 소리치는 이들의 앞에서 우린 무얼 하고 있었을까? 우리 신앙은 진짜로 게을렀다.


교부 암브로시오(Ambrosio) 주교는 예수를 따라 살자 한다. 예수는 어떠했을까? 경제적 어려움과 돌림병 그리고 사회적 병폐로 몸과 마음이 아픈 가난한 이들의 벗이었다. 누구도 다가와 손 내밀지 않은 이에게 벗으로 다가선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이다.



그저 생물학적 인간일 뿐, 사회 존재론적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하던 이들에게 참된 인간으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한 것, 당신도 진정 우리 모두와 같은 인간이라며 손 내미는 것, 그 자체 이미 기적이다.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이에게 참된 인간으로 부활하게 하는 기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나의 신앙은 손 내밀지 않았다. 게을렀다. 고개 돌리고 외면했다. 심지어 조롱했다. 내가 참으로 게을렀다.


암브로시오의 분노가 날 혼낸다. 그는 사회적 아픔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성물(聖物)을 내다 팔았다. 잔혹한 비난을 예상할 수 있었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언젠가 포로들의 몸값을 위해 성물을 부수어 내다 판 것 때문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위기에서 남자들을 구하고, 죽음보다 더 사악한 추행으로부터 여인들을 구하고, 죽음이 무서워 배교(背敎)하게 되는 아이들과 우상숭배의 타락에서 그 아이들을 구했음에도 이를 두고 기분 나빠한다면, 이것이 오히려 더 잔혹한 일입니다!” (<성직자의 직무론>2,28)


암브로시오에게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성전 건물도 성물도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 아파하는 사람이었다. 성물을 부수어 팔아서라도 당장 이들을 돕는 것이 성직자의 가장 우선된 임무라 확신했다. 그것이 그에게 신앙이었다. 그의 신앙은 게으르지 않다.


가난한 이를 두고 그들의 탓이라 조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자들의 도적질 같은 탐욕 때문이라 그들의 면전(面前)에서 비판했다. 그에게 가난한 이는 절대 조롱의 대상이 아니다. 가장 먼저 안아주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신앙을 이어갔다.


아무리 큰 교회 건물이라 해도, 가난한 이를 위한 공간이 없다면, 그곳이 올바른 신앙 공동체의 공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 공간은 굳이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무리 부유하고 비싼 옷으로 치장을 해도, 그 속에 가난한 이를 향한 공간이 없다면, 정말 올바른 신앙을 가진 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삶 속에 가난한 이를 위한 자리가 있어야만 한다. 그냥 가난한 이가 불쌍하니 그저 돕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가난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 자체를 바꾸라 한다. 가난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다. 가난은 바로 우리의 본질이다.


인간은 원래 가난하다. 우린 아무 것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지옥이든 천국이든 어떤 것도 챙겨가지 못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원래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존재다. 신이 창조한 이 세상은 누군가의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공유된 것이고, 모두에게 공동의 권리가 부여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러한 공유물을 독점하여, 오직 자신만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부자들의 소유욕이다.


“사유 재산이라며 고집하는 것은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는 짓이다. 자연은 원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공유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만물을 공유물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은 공통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사적 권리는 공동 권리를 빼앗아가는 짓입니다.” (<성직자의 직무론>1.28)


새는 가난하다. 어떤 소유물도 옶다. 하지만 모든 것을 공유하며 다들 살아간다. 자신에게 필요 그 이상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창고를 세우지 않는다. 신의 뜻은 바로 이것이다. 공유하길 바란다. 구성원 한 사람은 소유한 것 없이 가난하지만, 필요에 맞게 모두에게 공유된 삶이라면, 새와 같이 평화로이 살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그대가 소유한 양식을 다른 이와 공유하길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그대는 왜 그대의 소유물을 자랑하려 합니까! 하늘을 나는 새들은 자기만의 것을 소유했다고 독점하려 하지 않습니다. 새들은 그래서 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모르고 지냅니다.” (<루가 복음서 주해> 7, 124)


다시 말하지만, 신은 누군가의 소유물로 우주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공유를 원한다. 나누어 가짐을 원한다. 홀로 가짐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홀로 소유하고자 한다면, 그 자체로 악을 저지른 셈이다. 그것이 바로 소유욕이다.


“자연이 모든 인간들을 가난하게 낳은 이유를 부자들은 모릅니다. 우린 옷도 걸치지 않고 금과 은도 소유하지 않은 채로 태어났습니다. 우린 이 땅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로 벌거숭이로 왔습니다... 땅은 우리를 벌거숭이로 낳았듯이 그렇게 벌거숭이로 맞아들입니다. 소유한 모든 것을 무덤에 가져갈 수 없습니다.”(<나봇 이야기 1.2>)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우리의 본질은 가난이다. 근본적으로 우린 가난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소유하려 애쓰는 것도 결국은 헛된 것이다. 그런데 이 헛된 것으로 자신의 행복을 이루려 한다. 슬픈 일이다. 그리고 헛된 것을 향한 그 소유욕은 가난한 이에 대한 폭력으로 드러난다. 암브로시우의 분노를 직접 보자.


“부자들이여! 그대들의 그 미친 탐욕은 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가! 그대들만 이 땅 한 가운데서 살려는 것인가! 왜 그대들과 같은 본성을 지닌 다른 이들을 그리 내쫒는가! 도대체 왜 이 자연을 혼자 소유하려 하는가! 땅은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같은 권리로 주어져 창조된 것임을 모르는가! 어찌하여 그대 부자들만을 위한 그대들의 권리를 생각하는가!”(<나붓 이야기 1.2>)


이처럼 소유란 가난하게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고 스스로에게도 헛된 욕심에 사로잡히게 한다. 슬프게도 어떤 죄책감 없이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부자들의 몸에 감긴 비단옷과 금실로 만든 두건은 살아있는 이에게는 아픔을 주고 죽은 이에게는 무익합니다.”(<나봇 이야기> 1,3)


부자들의 욕심, 화려한 삶은 살아있는 가난한 이들의 피와 땀이다. 부자도 본질적으로 가난하게 태어났다. 소유물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없다. 살아가며 얻은 것은 모두 착취로 얻은 것이다. 즉 누군가에 대한 잔혹한 악행으로 얻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자들의 술잔은 가난한 이의 피로 채워져 있다.


“부자의 식탁에 차려진 잔에서 죽음에 몰린 수많은 가난한 이들의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그대 부자들이여! 그대들의 쾌락을 위해 얼마나 않은 민중이 죽어야합니까! ” (<나봇 이야기> 5.19-20)


암브로시오가 살던 그때도 우리가 사는 지금도 부자의 쾌락을 위한 가난한 이의 아픔과 고통스런 착취는 있었다. 부자의 잔이 달콤할수록 가난한 이의 아픔은 더욱 더 쓰라리고 아팠다. 요즘도 자살하는 가족들이 있다. 간혹 그들을 나약한 이라고 비난하는 신자들을 본다. 암브로시오는 다르다. 부자를 비판하고 그들을 그리 둔 신앙을 비판한다. 그러면서 한번이라고 가난한 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고 한다.


“자기 자식 가운데 누구를 먼저 팔아야할지 골라야 하는 아비의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그 아비는 말할 겁니다. 어떤 아이를 먼저 팔아야하는가! 한 아이를 팔아 돈을 얻는다 해도, 그 돈으로도 남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긴 역시나 부족한데... 진정 나에게 가득한 것은 걱정 근심뿐이구나. 누구를 팔 것인가! 어찌 돈을 받고 다른 이의 손에 자기 아이를 노예로 팔 수 있으며, 가격 흥정할 수 있으며, 두 눈을 뜨고 어찌 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찌 떠나가는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입 맞추며 작별의 인사를 할 수 있겠는가!” (<나봇 이야기 5.22-23>)


눈물 난다. 노비(奴婢)로 아이를 팔아 번 돈으로 남은 아이를 키워야하는 아비의 마음을 보자. 이것이 진정 과거의 걱정이기만 한 것인가? 아니다. 요즘 일어나는 일가족 자살을 보자. 돈 때문이다. 돈이 없어 아비가 자녀를 죽이고 아내와 독약을 마신다. 그 아비의 마음을 보자. 독약을 준비하고 유서(遺書)를 쓰는 그 아비의 마음을 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그들의 무능인가, 그 아픔인가?


암브로시오는 아픔을 보았다. 정말 보아야하는 것은 아픔이다. 정말 들어야하는 것은 그들의 울음이고 진정 보아야하는 것은 그들의 눈물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암브로시오는 부자들이 보지 못하는 것, 탐욕에 눈에 멀어 보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며 부자들을 향해 분노한다.


“가난한 이들이 그대 앞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이미 탐욕으로 귀를 닫아 버렸습니다. 부자여! 그대들은 이 백성들의 울음을 볼 줄 모르고, 성서의 말씀도 듣지 않습니다.”(<나복 이야기> 5.25)


부자들은 이미 가난한 이들의 울음이 들리지 않는다. 정말 보고 들어야하는 것은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의 소유욕을 채울 생각뿐이다.


“그리 소유하고도 더 큰 창고를 세워야지라고 말합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 창고 세우는데 돈을 그렇게 낭비하지 말고,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야 합니다!”(<나봇 이야기> 7,35)


잔혹한 부자들은 나눌 마음이 없다. 오직 더 소유할 생각뿐이다. 풍년보다, 곡식이 부족해 물가(物價)가 올라가는 것을 더 기대한다. 물가가 오르면 더 많은 이윤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통 소유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다. 가난한 이들의 아픔과 분노는 말 그대로 남의 일이다. 그저 자신의 욕심만을 생각할 뿐이다.


“풍년은 모든 이들의 것입니다. 그러나 기근(飢饉)은 오직 탐욕스런 인간에게 이득이 됩니다. 탐욕스런 부자들은 식량이 풍성해지기 보다는 부족해서 물가가 오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리고 쌓아올린 곡식이 창고를 차고 넘쳐 가난한 이들에게 쏟아지고 가난한 이들에게 어떤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하는 이들이 바로 저 부자들입니다.”(<나봇 이야기> 7.35)


부자란 이렇다. 자식을 위해 한 명의 자식을 팔아야 하는 부모의 울음 앞에서도 자기만 생각한다. 돈이 없어 온 가족이 자살해야하는 슬픔 앞에서도 나눔 보다 자신의 이득을 따진다. 혹시 자신들의 소유물이 차고 넘쳐 가난한 이들에게 작은 이득이라도 될까 걱정한다. 부자들이 더 많이 벌면 그 돈이 차고 넘쳐 가난한 이들에게 이어진다는 이상한 이야기가 헛소리임은 암브로시오는 이미 그때 알았다. 부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한 마디로 정리한다.


“부자는 소유를 통한 이윤 말고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나봇 이야기> 5.36)


부자란 바로 이런 이들이다. 소유욕뿐이다. 이들이 성당을 다니고 교회를 다녀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들의 신앙이란 것도 결국 자신이 가지고 싶어 하는 돈과 장수(長壽)에 대한 소유욕의 발현(發現)일 뿐이다. 이런 신앙이 참 신앙일까? 간혹 부자가 된 여정을 자랑하며, 간증(干證)하는 이들이 있다. 슬프지만 암브로시오는 이런 부자의 신앙을 의심한다. 정말 신이 원하는 신앙이 그러한 것인지 의심한다.


"그대가 나그네를 영접하고 궁핍한 이에게 나누면, 그 사람들은 그대로 인하여 성인(聖人)과 교제하게 되고, 영원한 안식에 머물게 됩니다. 가난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의 필요와 궁핍한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는 이들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심판의 날 그들은 주님과 구원을 얻게 될 겁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비의 빚을 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고린토인에게 보낸 첫 편지 주해> 10, 3)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천국행 열차표를 파는 신앙은 천국을 소유하려는 소유욕의 발현일 뿐이다. 암브로시오는 그러한 신앙을 참된 신앙으로 보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어둠 가운데 빛남이다. 가난한 이에게 빛으로 내려 앉아 빛이 값없이 자신의 환함을 나누듯이 그렇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한 나눔이 빛이 되어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방황하는 이들을 참된 안식의 길로 안내하는 것, 그것이 신앙이라 보았다. 그리고 신은 그러한 신앙을 실천하는 이를 자신의 조력자로 여기고 반겨주신다 확신했다.


암브로시오는 말한다. 신앙이란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먼저 보는 것이고, 그 아픔을 공유하고, 그의 벗이 되는 것이다. 그의 신앙은 게으르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그들의 나태함 때문이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아픔을 먼저 보았다. 사회적 아픔을 당하는 이들을 신분이나 사회의 탓이라 하지 않았다. 이 역시 그들의 아픔을 먼저 보았다.


성물을 내다 팔아서라도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려 했다. 그것이 신앙이라 믿었다. 가난한 이의 울음과 눈물을 듣고 보며 함께 울고 분노하는 것이 신앙이라 믿었다. 그들의 벗이 되고 그들과 공유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은 게으르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의 신앙은 게으르다. 여전히 아파하는 이의 탓을 한다. 그러나 정말 게으른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이었다. 게으른 우리의 신앙 때문에 슬픈 가난의 이야기는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봇의 이야기는 그저 옛날의 이야기이지만, 실상은 매일 일상처럼 일어납니다... 날마다 나봇들이 쓰러지고, 날마다 가난한 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두려운 이들은 자기 땅을 부자에게 바치고, 막내 아기를 업은 채, 어린 자녀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아내는 남편을 따라 무덤에 가는 사람처럼 울면서 남편을 따라갑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우는 것 보다 더 고통스럽게 울며 따릅니다.”(<나봇 이야기 1.1>)


슬프게도 그의 분노는 지금도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돈 때문에 자살을 선택해야 하는 이들의 아픔 앞에서 우리의 신앙은 게으르다. 참 슬프고 화나는 일이다. 이제 게으르지 말자.


덧붙이는 글

유대칠 : 중세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는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중이다. 현재 대구에서 오캄연구소를 만들어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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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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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mh52502015-06-11 12:36:17

    가난한 이에게 김밥 한줄을 주는게 더 진리인것 같읍니다.
    이글을 읽으며 이태석 신부님이 말씀하신 학교가 먼저냐 교회 건물 건설이 먼저냐에 고민 하시던 글을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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