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6일 수요일, 맑음
현충일(顯忠日). 프란치스코 교황은 근현대사에서 정의와 자유, 민주와 평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거나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모두 ‘순교자(殉敎者)’라고 불렀다. 한달전, 제주의 강우일 주교님은 해방후 제주에서 우익세력에 학살당한 모든 4.3 희생자들을 ‘순교자’라고 경칭하였다. 그러니 현충일에 노무현 대통령의 봉하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순교성지순례’가 되는 셈이다.
친구 한목사 부부가 새벽부터 부천 이엘리에게 가서, 7시에 봉하마을을 향해 떠나왔다. 우리와는 10시 30분에 생초에서 만나 우리 여섯이 엘리가 운전하는 차 한 대로 가기로 했다. 미적거리다 엘리네보다 늦을세라 엄청 달렸더니, 박수녀님 말씀이 강을 낀 굽이굽이를 ‘포르물라 우노’ 경주차처럼 내달리자 잔뜩 긴장하여 손잡이를 꼬옥 붙잡고 있었단다. 그런데 보스코는 너무 태평하기에 그게 더 놀랍더란다.
보스코와 살다보면 늘 잘 준비된 경주마처럼 대기하고 있다가 주인의 뜻대로 내달리는 게 내 사주팔자. 보스코야 언제나 ‘나중에!’라고 느긋하여 ‘성나중씨’라 불리지만 성질 급한 내가 더 분주한 게 당연하더라고, 그렇지만 내 일기 페친이면서도 사흘간 우리와 지내보니 ‘이 가정의 평화의 주역은 대사님!’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평. ‘사람들은 불공평하다. 먹여주고 재워준 건 난데 왜 보스코가 점수를 더 받을까?’ 궁리를 해 보는데, 답이 안 나온다. 그런데 그게 하나도 억울하지 않은 건 또 무슨 조화일까?
우리가 생초 톨게이트밖에 도착한지 5분 후, 정확히 10시 30분에 엘리네차가 도착하여 한차로 옮겨 탔다. 봉하마을을 한목사 부부가 처음 간다기에 권여사님을 찾아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송신부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1시부터 중대한 모임이 있으므로 1시 이전에 만나 볼 수 있다는 소식이 왔다.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냅다 달리는 이엘리의 운전솜씨에 대한 수녀님의 평이 역시 ‘포르물라 우노!’
비서실과의 연락에 착오가 있어 좀 헤매다 12시 30분에는 권여사님을 만났다. 보수꼴통이 극우언론을 동원하여 ‘아방궁’이라던 집은 코딱지만하고 현관 모기망문은 우리 식당채와 똑같았고 둥근 탁자에 소박한 응접실에서 수수한 평상복의 권여사님이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로마에서부터 이어진 인연(2007년 노무현대통령이 교황청을 국빈방문하였다)으로 살아생전에도 봉화로 노대통령 부부를 만나본 것도 우리의 행복한 기억이다. 오늘 한 분만 보니 혼자서 그동안 겪었던 고통이 여사님의 조용한 언행 속에 절절히 느껴진다. 그래도 당신들의 친구 문대통령이 국정을 잘 이끌고 계시니 마음이 편하다는 말씀이다.
권여사님은 우리와의 대화중에 시종일관 환하게 미소를 짓는데 그 웃음이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그간 견뎌야 했던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에린 핸슨의 시처럼 ‘가장 환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눈물 젖은 베개를 가지고 있고, 건너편 풀이 더 푸른 이유가 그곳에 늘 비가 오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 못한다. 짧은 만남에도 ‘선약이 있어 점심식사 대접을 못한다’고 미안해하며 각자에게 부채선물을 주셨다.
부엉바위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노대통령의 묘, 너럭바위에 가서 참배를 하고 각자 오늘 이 자리에 선 소감을 방명록에 썼다. “민주주의에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는 묘석의 글은 깨어있는 국민이 뭉칠 때만 민주주의가 바로 선다는 역사적 사실을 당신의 죽음으로 일깨워주는 호소였다.
근처 식당에서 비빔밥과 국밥, 도토리묵과 막걸리로 간단하게 허기를 달래고서 봉화산 부엉이바위로 올라가서 비극의 현장과 봉하마을 앞들을 내려다보았다. 걷기 싫다는 보스코를 어르고 달래서 함께 산행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의령에 들러 ‘의령 소바 원조집’에서 메밀국수와 만두를 이른 저녁으로 먹었고 귀요미 미루를 찾아보러 산청에도 들렀다. 선거사무소에서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일행이 미루를 보고 싶어하던 사이들이었기에 찐한 만남이었다.
미루는 밝게 웃고 있었지만 무지 힘들어 보였다. 나도 어서 선거기간이 가기만 기다린다. ‘이왕 시작 했으니 승리하거라!’ 문대통령이 낼모레 우선투표를 한다는 소식으로 미루어 싱가포르 북미회담 준비가 잘 되가나보다. 저녁뉴스에 우리 여섯 명 전부가 < JTBC > 뉴스를 보면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이다! 일기를 쓰는 이 시각, 보스코도 손님들도 이미 꿈나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