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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Lady D’와 ‘김정은’
  • 전순란
  • 등록 2018-06-11 10:47:58
  • 수정 2018-06-11 10: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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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0일 일요일, 흐림


하루 종일 흐리니 해가 땅을 덥힐 시간이 없어선지 산속 마을은 오히려 서늘하다. 겨우내 입던 옷을 빨아서 상자에 넣어 두려고 한 편에 개켜 놓았던 겨울옷을 다시 꺼내 입었다. 공소예절에 온 사람들도 다 두꺼운 옷이다. 오늘은 그동안 공소에서 안 보이던 거문골댁도 왔다. 거문골댁은 조용하고 수줍어서 늘 남을 먼저 배려하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한다. 그런 그니의 성격이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자책감이 심해 그 심사를 풀어 주느라 무던히 다독여주었다.


그날은 거문골댁네 밭에 거름을 내고 있었는데 12시경 윗동네로 오르는 길목에서 고양이 싸우는 소리가 났다. 우리 동네는 워낙 길냥이가 많아 번식기에는 서로 싸우는 듯한 소리가 심해 그러려니 여기고 부엌에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119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를 싣고 떠나는 소리도 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문골양반이 경운기를 몰고 그 밭에서 내려오다 전복 되어 가슴이 짓눌렸는데 아줌마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경운기를 들어 올릴 수가 없더란다. 고양이 싸우는 소리는 아줌마의 절규였다! ‘왜 달려 내려와 도와 달라고 하지? 우리 집만 해도 사람이 넷이나 되는데 함께 들어 올릴 수 있었잖아요?’ 하니까 점심시간이라 다들 식사 중일 것 같아 미안해서 못 왔단다. 내가 화를 내며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인데 점심이 대수냐?’고 했더니 그냥 흐느껴 울기만 했었다. 


자기가 미련했다고, 달려와서 도와 달라 했더라면 남편이 살아날 수도 있었는데 바보짓을 했다고 두고두고 후회했다. 경상도처럼 여자라고 사방에서 윽박지르는 환경에서 살아 왔다면 아마 나도 그랬을지 모른다. 몇 년을 두고 ‘남편 죽인 년’으로 자신을 나무라며 얼굴도 못 들고 다니더니 ‘세월이 약이라’ 이젠 평상으로 돌아왔다.


지난겨울 넘어져 다리를 다쳐 걷기에도 불편하여 농사일을 접어야 할 형편이나 시골 할메들은 ‘농사일을 못 하면 죽는다’는 철칙을 안고 살기 때문에 밭고랑을 기어 다니면서도 농사일을 못 놓는다. 며칠 전 밭에서 양파 여덟 망을 캐놓고 밭에서 집까지 가져가지 못해 애타 한다는 사실을 그니의 (유일한) 친구 드물댁이 내게 알려줘서 차로 실어다 주었다. “어째, 고마워서? 사모님. 이 양파나 한망 가져가요.” “우리 밭 양파도 열 망은 더 돼요. 괜찮아요. 같은 ‘성당 식구’니까 ‘성당 동생’이 도와줬다 생각하세요.” 이렇게 다리를 다쳐 한 달 넘게 공소를 빠졌던 거문골댁이 ‘성당 동생의 일’로 고마워 공소엘 다시 나오나보다.




진이가 한빈이를 데리고 내려오니 휴천재가 기쁨과 활기로 가득 찬다. 아기가 꼭 안기면 얼마나 보드랍고 말캉한지!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 비빌 때는 아가 냄새가 얼마나 달콤한지! 살그머니 웃는 아가 웃음은 천사 같아 우리는 아가에게 미리 안젤로(천사)라는 세례명을 붙여주기로 했다.


이렇게 예쁜 아가를 낳느라 고생한 진이와 남편 진혁에게 축하의 점심을 차려주었다. 사랑스런 이 부부가 아가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처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 나가리라 믿는다.



보스코가 몇 그루 배나무에 봉지를 마저 싼다고 아침나절 배밭에 갔다 오더니 깔따구에 또 물렸다. 며칠 전에는 눈을 물려 ‘눈퉁이가 밤 퉁이’가 됐더니 오늘은 입술을 물려 완전히 ‘아프리카 루뭄바’가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예민해져서 ‘벌레 알레르기’가 생겼나?


저녁뉴스는 < JTBC > 손석희 앵커가 아예 싱가포르에서 방송을 진행한다. 20년 가까이 북한공격을 외치던 국제사회가 지켜보는데 김정은이 ‘세기의 회담’을 하러 싱가포르에 도착해서 3000여 명 기자가 집결할 만큼 세계 언론을 독차지한 주인공이 되었다. 판문점 회담에 이어 오늘부터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멋진 장면에 나도 기분이 좋다! 




20여 년 전, ‘Lady D’라고 불리던 여자가 있었다. 영국 왕세자 챨스와 이혼하고서, 자유부인을 자처하다 ‘영국의 전직 왕세자비가 아랍인 도디의 다섯째 부인으로 들어간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그니를 창녀 취급하던 영국언론이, 그니가 파파라치들에 쫓겨 파리 지하도에서 교통사고로 죽자 이튿날 아침부터 돌연 그니를 ‘성녀’로 추앙하고 전 세계 정치지도자들을 불러모아 ‘세기의 장례’를 치러주던 희극이 연출되었다. 


곡절이야 어떠했든, 아무튼 ‘우리 정은이’가 한반도의 핵 없는 평화를 위해서 ‘세기의 관심’을 받으며 트럼프와 당당히 팔씨름을 하면서 ‘세기의 회담’을 갖는 순간이 기다려진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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