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3일 수요일, 맑음
간밤에 트럼프와 김정은 일로 너무 흥분했었는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게다가 엄마가 한밤중에 자다 어둑한 구석에서 뭔가를 뽀드득 뽀드득 먹는 소리가 들렸다. 옛날 어느 할메가 부엌에 쭈그리고 앉아 뭐를 먹는데 자세히 보니 사람 해골이 놓여있더라는, 엽기적인 소리였다.
“엄마, 새벽 한시야. 오밤중에 뭘 먹어?” 엄마는 내게도 먹으라고 뭘 내민다.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도 ‘할메가 뭔가 먹으라 쑥 내미는데 사람의 팔뚝이었다’라는 얘기가 나오지만 엄마 손에 쥐어진 것은 사람 팔뚝이 아니고 야쿠르트였다. 베개 뒤에 감춰 두었다 들키자 머쓱해서 나를 공범자로 만들려는 수다.
“엄마 한 밤중에 이렇게 먹으면 이가 상해요!” 하기야 엄마한테는 상할 이도 몇 개 안 남았는데 앞니는 잘 익힌 옥수수 빠지듯 하루아침에 4개가 빠졌고, 잇몸에 뼈가 없어 임플란트도 못해드리고, 그래도 남은 어금니로 새우깡을 드시는 중! 내가 나무라선지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내 베개 옆에도 새우깡 한주먹이 놓여 있었다. 나 어렸을 적에 집에 사는 고양이를 심하게 나무라면 녀석이 생쥐를 잡아다 그 사람 신발에 넣어두는 심술을 부리곤 했는데…
“엄마 이게 뭐야?” “나도 모른다.” “엄마 먹는 거구나.” “나, 그런 거 안 먹는다, 얘. 이도 없는데.” 그러면서 엄마는 입을 벌려 이가 다 빠진 빈자리를 보여준다. “아하~ 쥐가 물어다 놓았구나!” 그런데 지금 엄마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내가 화장실에 있는 동안 호천이가 전화를 해왔다. “엄마 누나 왔죠?” “아니, 안 왔다. 늘 혼잔걸…” 내가 그 소릴 듣고서 화장실을 나서며 “엄마 나 여기 있잖아요?”라면 “너 언제 왔니?”라고 되물으신다. 밤새 같이 자고 방금 아침밥 같이 먹고서도 기억이 없는 우리 엄마. 그 귀여운 거짓말쟁이(?) 엄마가 난 좋다. 이렇게 97세 나이로 우리 곁에 계셔주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다.
어제 백광현 신부님 모친 ‘박고명 안나’ 여사가 95세로 하느님 품으로 떠나셨다는 부고가 떴다. 미리내 실버타운과 가까운 거리인 성환에 빈소가 차려져 아침 일찍 문상을 갔다. 그런데 벌써 살레시안들이 한 무리 미사를 마치고 있었다. 회원 부모의 장례식장에는 살레시안들이 모조리 와서 미사를 드리고 연도를 바치고 문상객들을 맞는 풍경에서 살레시안들의 가족정신이 남다르다.
1시에 연희동에 있는 일식집 ‘강수사’에서 호연이가 ‘장로님 턱’을 낸다고 해서 부지런히 갔다. 네 형제간이 모여 맛있게 점심을 먹고 어렸을 적 이야기까지는 공통분모가 있어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데, 정치 얘기나 세상얘기가 나오면 자꾸 마음이 상한다. 같이 가서 묵묵히 듣고 있는 보스코에게도 미안하다.
‘이명희가 성질 좀 내고 뭘 던졌다고 잡아가두려는 나라가 어딨냐?’ ‘세월호 사고난 날 대통령이 머리 좀 만지고 보톡스 좀 맞았다고 감옥에 가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이놈의 나라는 독재국가요 북한과 똑같다!’ ‘대기업들 때려잡으러 혈안이 된 정권 땜에 나라 경제가 다 거덜났다.’ 그 밖에도 상상이 안 가는, ‘태그끼 아재들’다운 얘기에 ‘왜들 저럴까?’ 궁리하다가 어제 북미회담의 성공, 오늘 패배할 보수의 파탄이 꼴보들에게 ‘저런 심리적 공황상태를 만들겠구나’ 하는 동정심이 든다.
막내 호연이가 ‘형들, 일 년에 몇 번 형제끼리 오늘처럼 만납시다’라는 말에도 ‘엄마가 눈에 밟혀 어떻게 우리끼리 만나냐?’라는 대꾸가 나오는 까닭은, 술도 안 먹고 고스톱도 안 치는 우리 집안에서 나누는 게 말뿐인데 시국관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서로들 정말 힘든가 보다. 참 나쁜 정치는 나라만 망가뜨리는 게 아니고 가족 간의 평화도 망친다.
그래도 우이동 집에 돌아와 저녁 6시가 되자 ‘세상이 화악 디지비는’ 소식이 뜬다. 여론조사 그대로! 출구조사 그대로! 개표가 진행된다! 현명한 국민이 저렇게 결단을 내렸으니, 내일 아침엔 세상이 온통 바뀌어 있을 테니, 홍준표를 위시한 꼴보들에게는 ‘전설 따라 삼천리'의 악몽에 뒤척이는 밤이겠지만, 나는 발 뻗고서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하느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