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휴천재일기] ‘드디어 대통령 선거 개표가 완료된 기분!’
  • 전순란
  • 등록 2018-06-15 11:00:57
  • 수정 2018-06-15 11:01:45

기사수정


2018년 6월 14일 목요일, 비오다 갬


요 며칠간은 폭풍우 속을 달려온 기분이다.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그리고 지방선거로 이어지는… 우리의 심사만 아니라 그야말로 한반도의 운명을 두고 엄청난 고비를 넘어가는 중이다. 찌는 더위, 타오르는 갈증, 어디를 둘러봐도 그늘 하나 없이 먼지만 풀풀 날리는 길을 달려오다 그러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온몸을 내맡기고 시원스레 비를 맞는 기분이랄까? 빗줄기가 세차 몸이 비칠거려도 그 빗살 속에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다! 


오늘 아침엔 정말 행복하다. 누구의 멘트처럼 ‘드디어 대통령 선거 개표가 1년 만에 완료된 기분!’이다. 촛불혁명, 박근혜 탄핵, 대통령선거, 그리고 적폐세력의 발톱을 뽑아낸 지방선거! 



우리 부부는, 특히 보스코는 마음이 여려서 스릴 만점의 긴장어린 영화나 경기를 못 본다. 누가 누구를 반드시 때려눕혀야만 이기는 시합이면 안쓰러워서라도 눈길을 돌린다. 간밤의 기쁜 출구조사 발표에도 보스코는 대강만 듣고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잠이 깊이 들지도 못하고 마음도 은근히 초조해서 뒤치락거렸을 게다. 


내가 일기를 쓰던 11시경 애가 탔는지 친구들이 나한테 전화를 해 따진다. “김경수 후보가 왜 출구조사와 다르게 고전하나?” “낸들 아나? 내가 선관위도 아니고 합동보도반도 아니고?” 그럴 경우 정답만 들려준다. “요새는 출구 조사가 틀리는 일 없으니까 그냥 끝까지 지켜보셔. 답답하면 TV 끄고 푹 자고서 내일 아침에 열어보시든가. ‘세상이 화악~ 디지벼져’ 있을 테니…” 물론 자정이 넘고 김경수가 앞으로 제치고 나가자 더는 전화가 안 왔다.




아리스토텔레스 말대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지만 약속이나 한듯 보스코와 내가 한 시간에 한번 번갈아 잠을 깨어 핸드폰으로 개표상황을 살피고 상대방에게 알려주고, 다시 잠들자고 베개에 머리를 묻고, 그러기를 새벽까지 하다가 잠들었다는 얘기까지는 차마 털어놓고 싶지 않다.


2002년 12월! 노무현 후보가 바로 전날 정몽준네 대문 밖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돌아가던 날! 그리고 그 다음날 저녁! 노후보가 떨어지면 가슴이 뻥 뚫려 밤새 한숨으로 몸을 뒤척일 보스코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출구조사 발표시각에 나는 집밖으로 나와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로 첫 발표를 들었다. 비관주의자 보스코는 노후보의 패배를 예감했는지 TV도 안 켜고 글을 쓰고 있었다. (본부인 사라한테서 쫓겨나 이스마엘을 안고 광야를 헤매던 하가르!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아기를 덤불 밑으로 내던져 버리고는, 활 한 바탕 거리만큼 걸어가서 아기를 마주하고 주저앉았다.’는 창세기[21장] 장면이 떠올랐다.)


“나라가 통째로 넘어갔다, 드디어 국민의 손에!”



그런데 출구조사는 복음이었다! 집으로 달려갔다. 보스코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서 그날로 그 자리에서 각서를 받았다. “당장 이 자리에서 써요! ‘다시는 정치적인 사안으로 안달복달하여 아내를 속 썩이지 않겠음!’ 이라고!” 그 각서는 지금도 어딘가 파일에 끼어 있을 테고, 그날 밤 개표는 출구조사 대로 나왔다. 그러고서 우리 부부에게는 난데없는 5년간의 외교관 생활이 닥치기도 했다.


다섯 시쯤 삼성역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한미미 이사가 제작한 영화 ‘허스토리’ 시사회에 갔다. 한목사와는 미리 만나 저녁을 먹고 영풍문고에 책을 사러 들렀는데 내가 찾는 책은 없어 다른 서점을 찾았으나, 그 넓은 코엑스에 먹을 것 입을 것은 그리도 많은데, 서점은 딱 하나뿐인 게 안타까웠다. 




8시가 다되어 이엘리가 도착해 상영관에 함께 들어갔다. 내가 아는 많은 인사들이 초대받아 와 있었다. 오랜만에 선배 현숙이 언니도 보았고, 한미미씨와 부친 한완상 교수님, 여가부 정현백 장관, 그 외에 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해 힘쓰는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내용이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연이지만 전문가의 손길에 닿았기에 최루가스 마신듯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엘리도 눈이 벌개져 부천으로 떠났고, ‘픽션이다’ ‘논픽션이다’를 얘기하며 한목사와 나는 같은 지하철을 타고 정릉까지 돌아왔다. 


저렇게 아픈 가슴을 안고 인생의 마지막 고비를 오르고 있는 할머니들 생각을 하면서도 남은 자들이 해드릴 일이 별로 없이 죄스러움이 커다란 맷돌처럼 가슴을 짓누른다. 어제의 선거에서 힘을 받은 문정권이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고 많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TAG
키워드관련기사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가스펠툰더보기
이전 기사 보기 다음 기사 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