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7일 일요일, 흐림
운전을 하고 같이 여행을 하고 돌아와도 운전한 아내는 다시 저녁 준비를 하고 그 뒤 집안청소와 빨래까지 해 널고 나면 12시가 훌쩍 넘는다. 그래도 소파에 길게 누워 있는 남편에게 무슨 말을 못하는 이유는, 강연 다니는 자기는 곰이고 나는 왕서방이라는 변명 때문.
재주를 부리라고 곰을 싣고 다니고 곰이 부리는 재주로 먹고사는 왕서방이라면 당연한 일. 집으로 돌아와서도 곰은 우리에서 쉬고 왕서방은 곰의 먹거리를 챙겨야 한다니까 맞는 말이다. 내가 가끔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다 보면, 처음 얼마간은 편하다가 한참 지나면 조수석에서 앉아만 다녀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임을 느낀다. 그러니 곰도 사람도 실려 다니는 게 피곤하다는 말은 맞다.
밤 2시 넘어 내가 잠자리에 든 것을 알기에 보스코가 아침상을 차리고는 9시 어린이 미사 말고 11시 교중 미사에 가자했지만 어린이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면 꼬마들에게서 축제의 기운을 받기에 정신줄을 바로잡고 몸단장을 했다. 어린이 미사 시간 아이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 따라서 어린이 성가를 부르는 소리도 점점 작아진다.
어렸을 적 우리 빵기처럼 악다구니로 노래를 부르는 꼬마가 하나 있어 그나마 다행. 걔가 딴전을 피우면 우리도 맥이 빠지다가 걔의 우렁찬 노랫소리에 성당이 생기를 되찾곤 한다. 어린이 어른 목소리 전체와 맞먹는 목청에다 음정과 박자도 정확하고 높은음에서도 흔들림이 없어 이담에 벨칸토 창법으로 자라서 ‘국산 파바로티’가 하나 탄생할지 모른다.
오랜만에 본당미사에 왔더니 ‘율동 찬미’를 하는 멤버도 보강이 되었고, 제일 어린 남자애가 어찌나 열심히 율동을 하는지 당신께 올리는 미사가 소란하고 어수룩해 좀 서운하시다가도 그분께서도 빙그레 웃으실 것 같다. 신부님도 아이들의 눈길과 관심을 잡으려 무던히 노력하다가 힘이 빠진 듯 강론이 두서가 없어지고 만다.
미사 끝나고 신부님이 보스코를 만나 내놓는 탄식. 학생들이 교적상 100명이 넘는데 출석인원은 30명 정도. 청년(20세~35세)은 교적상 300여명인데 성당 나오는 숫자는 주일학교 교사하는 여남은 명이 전부. 우리 성당만 그런지 서울시내 본당이 다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다 신부님 말씀이 ‘캥거루족’으로 옮겨갔는데 엄마의 치마폭에서 못 벗어나 취직도 않고 용돈까지 받는 3, 40대 싱글이 엄청 많은 게 걱정이란다. 그래도 이르든 늦든 엄마로부터 독립한 청년들은 무엇을 하든 책임감 있게 열심히 살아가더란다. 말하자면 ‘엄마의 문제’. 영원히 아이로 남아 엄마에게 의존하게 키워낸 책임은 엄마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몫이다. (보스코의 경우처럼 자기 학문 빼고 100% 아내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마누라도 그에 못지않은 문제일 테고…)
내일 내려가면 언제 볼지 모르겠고 이번에 내가 서울 왔어도 별로 얘기할 시간도 없었다며, 아무래도 한번 더 봐야겠다며(사실 지난 목요일 봤는데) 이엘리가 인천에서 점심을 사러 우이동에 오겠단다. 그러나 여러 날 집밖에서 밥을 먹어서 된장찌개에 상추와 삼겹살이나 먹자 했더니 고기를 끊어왔다. 한국염 목사 부부도 불렀다. 언제 불러도 기꺼이 와서 맛있게 먹고 행복하게 놀다가는 친구가 있다는 건 각별한 복이다. 최목사님은 내일 네팔의 가난한 친구들에게 커피교육을 시키러 간단다.
손님들이 가고 4시부터 마당에 나무를 가지치고, 풀을 뽑고, 잔가지를 뒷산에 갖다 버리는 데 8시까지 땀을 흘렸다. 보스코가 힘이 들었던지 한 삼태기나 되는 풀을 놓아두고 집안으로 들어갔기에 마저 치우는데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며 ‘빨리 들어와 저녁 안 주고 뭐하냐?’는 투로 ‘아예 마당에 걸레질 하세요.’라고 투덜거린다.
흙마당을 걸레질하라는 말을 들을만큼 ‘내가 왜 이렇게 완벽주의자가 되었나?’ 헤아려보니 ‘무엇을 하나 해도 맺고 끊듯이 해라!’고 엄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하시던 교육 탓이다. 엄마와는 24년밖에 안 살았는데도 40년 지나서도 엄마 말대로 움직이는 나를 보면, 우리 두 아들은 내가 준 어떤 주문을 안고 살아가는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