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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올해의 양파 수확, 하지감자 수확
  • 전순란
  • 등록 2018-06-20 11:01:11
  • 수정 2018-06-20 11: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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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6월 19일 화요일, 흐리다 오후에는 비 조금



지리산에서는 잠을 조금만 자도 피곤하지 않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오늘은 무슨 일을 먼저 할까?’ 생각한다. 일의 순서에 따라 시간을 절약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내면 일이 끝나고 나서도 기분이 좋다. 동선을 절약하기 위해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가거나 아래층에서 위층으로 올라갈 때면 양손에 무엇인가 가득 들려있다. 


그러다가 뭔가 가지러 2층에 올라갔는데 그게 뭐였던가 생각이 안 나서 두어 번 헛걸음질을 하고 나면 기운이 쭉 빠진다. 그래서 잊지 않으려 소리내 중얼거리며 가지러 간다. ‘우유, 소금’ ‘우유, 소금’ 때론 급한 대로 손바닥에 볼펜으로 써가기도 한다. 한심해 보이지만 그러다 집에서만도 ‘만보(萬(步)’를 걷게 되니 다리가 아프도록 헤매도 어쩔 도리가 없다.


아까도 텃밭에 나가는데 핸드폰이 안 보여 보스코더러 전화로 좀 울려달랬더니 바로 눈앞에서 소리가 난다. 전에는 한번만 둘러봐도 한눈에 다 들어오고 위치와 상황이 쉽게 입력이 됐는데 이제는 기능이 떨어진다. 시야에 있어도 눈에 띄질 않는다. 업그레이드 안 된 채로 마모되어 사용기간이 끝나가는 기계나 같달까? 아니, 기계라면 이미 폐기처분 했을 거다


방곡에 집을 지은 이한기교수가 점심을 하자고, 우리의 오랜 친구, 미나씨가 일본에서 왔다고 만나러 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밀가루 반죽을 밀어 파이 밑판을 만들어 호도파이를 했다. 함양에서도 산청에서도 호도파이를 살 수 없기에 선물을 하려면 자가생산만 가능하다. 내가 아래층에서 바삐 움직이자 보스코가 말없이 2층 청소를 했다.


이교수네는 사변전에는 스무 가구 정도가 살아 ‘구마을’이라고 불렸다지만 마을의 흔적도 없는 산속이고, 우리가 ‘도사님’이라고 부르는 분의 빈집만 초입에 폐가처럼 을씨년스러운 골짜기 속에 터를 잡았다. ‘도사님’은 무슨 일로 ‘구마을’ 터가 (허준의 전설이 남은) ‘왕산’ 끝자락이요 특별하고 영험있는 기운이 돈다면서 30여 년 전부터 그 일대 땅이 나오는 대로 사들였고,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 해도 그 땅은 내놓지 않더니만, 이교수와 승임씨는 영적으로 그 땅에 들어와 살 자격이 있다고 하여 싼 값으로 그 땅을 내주었다.


미나씨는 영국인 남편을 금년 초에 여의고 혼자 남자 이교수네 집으로 더부살이 올 듯하다. 음악과 인도무용, 그리고 여행으로 살아가며 깊은 영성 세계에 침잠하여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생활하는 특별한 분이다. 예전에 그분이 서울에 올 적마다 ‘평화를 염원하는 기도회’(매달 13일에 개최한다)에 초대받아 우리도 함께했었다. 우리가 로마에 살던 80년대부터 알아온 인연이니 40년 족히 됐다.


미나씨는 여전히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잔잔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이 교수는 건축교수답게 구석구석을 당신이 꿈꾸던 설계로, 안내도가 없으면 찾아다니기 힘들만큼 멋진 집을 완성했다. 그 집을 완성하는데 1등 공신, 건축설계가이며 시공자인 준호씨는 인도 오로빌에 온 가족과 입주하여 사는 분으로 방학을 맞아 부인과 두 아들이 와 있었다.


승임씨의 미술작품과 수공품으로 꾸민 구석구석은 집안 전체가 미술관이었다. 특히 옆집 여동생의 집은 굉장한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그런 그림을 볼 눈도 살 돈도 없어 다행이다.



오후에는 양파와 감자를 캐기로 했었는데 비가 후둑후둑 떨어진다. 조금 늦게 집에 돌아오니 밭의 양파가 ‘비를 맞으면 썩어삐린다’고 드물댁이 혼자 다 캐서 머리에 여다가 집에다 갔다 놓았다! 하지감자도 그냥 두면 썩는다고 줄기를 다 걷어낸 참이어서 드물댁 채근에 얼떨결에 호미를 들고 내려가 감자 수확을 하였다.


캐낸 감자를 상자에 담고 창고로 나르는 일은 보스코의 몫. 양파 여섯 망, 감자 네 상자(보스코가 크기대로 골라 담았다)가 올해 농사소출이다. 우린 호리호리한 양파 모종과 쪼개진 씨감자를 심었을 뿐이고 키우고 두둑한 알들이 들게 해주신 분은 땅에 당신의 얼을 가득 채우시는 분이다. 


감자상자를 나르다 하나가 엎어져 감자가 시멘트길 언덕 아래로 우르르 구르자 ‘감자를 잡으러’ 달려 내려가는 보스코 모습이 올해 감자농사의 최고 백미다. 감자도 구르고, 보스코도 구르고, 나도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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