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1일 목요일, 맑음
꽃을 새로 심으려면 먼저 터 잡고 커오던 꽃들을 모두 뽑아내야 한다. 그동안 익숙하거나 정들었던 꽃들은 뽑아내기 미안하지만 눈엣가시처럼 불편했던 풀들도 있다. 봄이면 마당가 울타리에 기대어 피어나는 장미 중에 코스모스장미나 노랑장미는 귀하게 대접을 받는데 제일 흔한 빨간 장미는 어디선가 씨가 날아와 뿌리내리고 피어난 찔레보다 푸대접을 받는다. 생각 같아서는 그 장미를 뽑아내고 싶지만 주인의 심사를 미리 알고 젤로 열심히 줄기를 뻗고 꽃도 많이 피우고 잔병치례도 않아 그 노력을 가상히 여기는 주인의 묵인 하에 겨우 명을 지탱한다.
하짓날 새벽풍경
새벽에 눈을 뜨자 어제 뽑아서 던져놓은 ‘공작’, ‘범의 꼬리’, ‘설악초’, ‘노랑달맞이’가 생각났다. 우리 화단에 지천이어서 안주인에게서 버림받았지만 누구의 뜰에서라면 귀하게 대접받지나 않을까 싶어 감 박스에 담아 방곡 이교수네로 달렸다.
하짓날 6시도 안된 시간이어서 혹시 사람들이 아직도 잠자리에 들었을까봐 살그머니 다가가 차를 세웠는데 승임씨는 벌써 옷에 옷을 껴입어 깔따구 방지 무장을 갖추고 한손엔 호미, 한손엔 꽃모종을 들고 꽃자리를 찾고 있었다. 누가 시켜서 한다면 이 새벽에 이슬 밟고 풀섶을 헤맬까? 다들 ‘미쳤어! 미쳤어!’ 한다면 ‘그래, 나 꽃에 미쳤다.’라는 대답이 나올 게다.
오후엔 오랜만에, 참 오랜만에 독서회에 갔다. 박준 시인의 수필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을 읽고 온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나누었다 . 우리 모임의 특징은 책에 대한 이야기, 거기에서 나오는 다른 책이나 시도 찾아 읽고 난 후 각자의 마음을 나누는데, 처음엔 입으로만 얘기하다 이제는 글로 써와 읽기로 한 점이다. 그러자 글을 쓰는 실력과 열성이 많이 향상됐다고들 한다.
연수씨 이야기. ‘함양에서는 요즘 거리마다 마을마다 길가에 빠알간 꽃밭이 피어오른다. 지난겨울을 이겨낸 자랑스러운 양파다. 그러나 기뻐해야 할 추수 시절에 사람들은 우울해 한다. 양파 좀 사려고 가까운 밭으로 갔다. 그런데 그 밭에 빨간 깃발이 꽂혀있고 갈아엎을 거라면서 누구도 얼씬못하게 하더라.’
양파가 풍년이어서 수급조절이 힘들어지자 농협과 직거래한 대농부터 양파밭을 갈아엎으라고 했다더라. 총각은 밭을 갈아엎으려는데 할메는 자식처럼 키운 양파(올해 따라 유난히 탐스러웠다)를 기계로 갈아엎다니 ‘아깝고 죄받을 것 같다’면서 이웃들이 가져온 양푼에, 바가지에 하나라도 더 뽑아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하면 농협에서 보상 못 받는다고 아들은 옆에서 호통을 치고…
(연수씨가 보기엔 저런 ‘작은일’을 그냥 두면 농사꾼들 벌 받을 ‘큰일’이 생길 것 같더란다. 국가가 보상해준다 해서 ‘돈의 원리’에 굴복하는 젊은이, ‘내 새끼 같이 키워낸’ 양파를 그렇게 갈아버리는 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는 엄니, ‘대지의 여신 가이아’ 같은 마음…)
아들은 엄니가 또 누군가를 불러다 양파를 캐 줄까봐 한밤중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다 갈아엎고, 누군가 이삭이라도 주워갈까 벼를 심는다며 논에 물까지 대버렸다. 그렇게 갈아놓은 양파밭에 물을 채우고 날이 더워지자 양파 썩는 냄새가 시체 썩는 공동묘지 같아 온 동네가 그 악취로 몸살을 하더란다.
그러고서 전해오는 뉴스! ‘한국 양파 최대 생산지 무안 양파가 동해로 40%가 죽고 질 좋기로 유명한 함양 양파가 대신 수출계약을 맺게 되면서 이번엔 재고가 부족하여 양파 값이 천정부지!’
연수씨 마저 ‘작은일에 소홀할 때부터 큰일이 터지지’라는 예감이 들었는데, 농협에서는 현장에도 안 나와 보고 양파밭 갈아엎기부터 시켰다면서 몹시 분개했다. 박준 작가의 짧은 시처럼 이번에도 함양 양파농사는 ‘사람에게 미움 받고 시간에게 용서받는’ 일이 돼버렸다.
어제 감자를 캐고 난 밭에서 보스코가 이삭줍기를 해온 잔감자로 그가 어렸을 적에 먹어봤다는 반찬을 해주었다. 아범이 몇 주간 집을 비워도 든든한 엄마 곁에서 두 손주는 잘 자라고 있다고, 알프스 친구 마리오는 자기 뜰에 핀 으아리에 날아드는 벌을 관찰하고 ‘꽃과 벌’의 사진을 내게 띄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