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26일 화요일, 흐림
한림읍에서 금악으로 오르는 길은 수십 미터 앞이 안 보이도록 짙은 안개 속에 잠들어 있다.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면 손등에 부딪히는 안개가 빗물로 녹아서 떨어진다. 바로 이게 제주도 특히 금악의 전형적인 날씨란다. 6·25 직후(1954) 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로 제주에 오신 임피제(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P. J. Mcglinchey) 신부님은 이곳 금악의 기후가 당신의 고향 아일랜드와 너무 똑같아 여기다 ‘성이시돌 목장’을 세우셨단다.
가난한 제주에서도 제일 가난한 이곳 사람들에게 직업도 주고 희망도 주려고 60년 전 장장 100만 평 땅을 사들이고, 이런 기후에서 할 수 있는 최고, 아니 유일한 사업이 낙농이라 생각하고서 초지를 만들고 소와 양 그리고 돼지를 키우고 소젖 양젖을 짜 우유로도 팔고 치즈도 만드는 목장을 만들었다.
세월이 흐르고 사업은 자리를 잡고 사람들은 살만해졌고, 모든 사업이 그렇듯이, 어려움도 있었고 떠난 이도 있었고 남은 이들도 있고 하면서 이 일을 시작하신 임피제 신부님은 올봄에 이시돌 목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자리 잡고 누우셨다.
지난 3월에 임신부님(가운데)과 찍은 사진과 묘소
25여 년 전 살레시오 수녀님들이 이시돌 목장에서 세운 청소년수련시설 ‘젊음의 집’을 맡아하면서 살레시오 남자수도회도 금년에 진출하여 ‘숨비소리’라는 청소년 교화시설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완전 ‘도시형 인간’ 빵고신부도 합류하였다. 사람들은 빵고가 이 적막과 고요를 어떻게 소화할까 궁금해 하지만 하느님은 만사를 미리 안배하심에 틀림없다.
올 3월에 마친 로마 유학시절, 빵고는 이탈리아 북쪽 끝, 코모 호수 가까운 깡촌 관자떼에 알바 신부로 3년 내내 여름마다 서너 달 사목을 하면서 적막한 시골생활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그때 그곳의 고독과 적막을 받아들이게 훈련받아 여기서는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특히 큰형이나 삼촌뻘인 오신부님이 울타리가 되어 주니 전혀 문제가 없단다.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는 말씀도 있지만 주님은 철부지 빵고(아들이 아무리 나이를 먹고 아무리 사제여도 엄마 눈에는 ‘철부지 그대로’)를 이곳 금악에 데려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일을 시작하게 만드셨고 우리 아들은 그 뜻에 순명하고 움직이고 있으니 축복이다. 해가 있는 곳으로 꽃판을 돌리는 해바라기처럼, 우리 부부도 아들 덕분에 기회만 생기면 제주를 찾을 게다.
수녀원에서 아들과 미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숨비소리’ 정원 공사장에 들렸다. 물기가 온몸을 파고들어 그 찝찝한 가운데도 일꾼들은 열심히 불도저와 손을 놀린다. 육지에서는 누구의 소개를 받아 일을 맡기면서 잘못하면 불평 한마디 못하고 바가지를 쓰며 속을 끓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25년 전 휴천재를 지을 때도 시쳇말로 ‘개고생’을 했고 작년에 봉재 언니네도 집을 지으며 맘고생을 참 많이 했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믿을만한 사람이 소개하면 견적을 받을 때 비교견적조차 못 받고 전적으로 믿어야 하며, 깎거나 따지면 인간관계마저 끝장난단다. 일단 믿고 맡기면 최선을 다해, 또 최대한으로 싸게 해주는 신용사회가 제주란다.
‘숨비소리’ 정원 공사는 옆 본당 총회장님이 소개해준 이에게 맡겨졌고, 시공자는 성심성의껏 일해주는 모습이 우리 눈에도 보인다. 공사비도 (조경학의 마이스터인 ‘연술이 삼촌’의 말로도) 참 저렴한 가격이란다. 살레시안들의 이곳 사업이 다 잘 되리라는 좋은 예감이 든다. 더구나 새로 생기는 이 청소년 보호시설의 건축공사와 이번의 정원공사는 전적으로 불우한 젊은이들을 아끼는 관대한 이들의 헌금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단다!
빵고가 차를 운전하여 공항에 함께 나가서 아들은 ‘숨비소리’ 경리 일로 서울로 떠나고 우리는 11시 45분 비행기로 광주로 왔다. 2박3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아들을 가까이서 보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라산 발치에서는 그렇게나 시원하던 바람이 지리산 휴천재는 무척이나 후덥지근하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 이 칙칙한 날씨에도 진이네 가족과 착한 수사님은 블루베리 따느라 고생을 하다 어둑한 시간에 지친 몸으로 일터에서 돌아온다.
오늘 시작한 장마에 하늘의 저 무거운 구름도 지리산 발치에 물을 다 풀어놓고서야 갈 작정인가 본데 농익은 블루베리를 수확하는 농부에게는 장마가 최악이어서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