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5일 목요일, 흐림
서울집은 지리산 집의 반 정도 크기여서 청소도 손쉽다. 게다가 구총각의 영역까지 제외하면 지리산에서 위 아래층을 청소하는 수고에 비해 견딜만하다. 내 나이 80이 되면 서울로 올 것인지, 보스코가 80일 때 올 것인지는 그때의 건강상태에 따라 결정할 예정이지만 최소한 청소하고 가꾸기에는 서울집이 훨씬 수월하리라는 말은 맞다.
아침을 먹으려는데 야쿠르트가 없기에 이발소 가는 보스코더러 머리 깎고 돌아오는 길에 종균으로 쓰게 ‘불가리스 야쿠르트’, ‘물로 된 것’을 ‘하나만’ 사오라고 그림까지 그려 보여 주며 심부름을 시켰다. “여보, 내가 뭐 사오라고 했지?” “불가리스 야쿠르트” “어떤 형태?” “긴 것 물로 된 것.” “한개만 사와요.” “아니, 남자가 어떻게 달랑 하나만 달라고 하나? 두 개” “좋아 그럼 두 개. 오케이?” “응, 오케이.” “돈은 있어요?” “응, 지갑에 2만 4천원 있어.” 이렇게 두어 번 예습 복습 시켜 보냈는데 머리 깎고 돌아오는 그의 손이 허전하다.
야쿠르트는 어찌 되었냐니까 잊어 버렸단다. 다시 돌아가서 사오라니까 나중에 사온단다. 그럼 언제 만드냐니까 내일 아침에 안 먹어도 된단다. 이런 대화는 초딩 1학년 반 같은 책상에 앉은 기집애와 사내애 사이에서나 오갈 만한데 70이 다 된 할메와 80이 다 된 할베 사이에서도 별반 다름이 없다니…
3주 전에 마당의 풀과 나무를 정리하고 내려갔는데 마당에 다시 잡초가 지천이다. 겉옷 속옷 다 젖어도 상관없이 열심히 일을 하면서, 이발하고 들어오는 보스코에게 잔디를 기계로 좀 밀어 달라니까 ‘머리 깎고 와서 땀나니까 싫어.’ 한다. ‘응, 땀나면 안 되지. 또 샤워해야 할 테니까. 나는 괜찮으니까 내가 할게.’ 하지만 한참 있다가 양심에 좀 찔리는지 나와서 잔디를 밀고는 뭔가 더 시킬까봐 잔디깎이도 놓아둔 채 뒤도 안보고 들어간다.
잔디깎이를 창고에 갖다 두며 보니 심야전기 온수보일러 감압밸브가 고장 나 창고가 물난리가 났다. “여보 물 쏟아지는 것 못 왔어요?” “응, 봤어. 당신한테 얘기해 준다고 생각하고는 잊었어” “아주 잘했어요. 다음엔 잊지 말고 꼭 얘기해 줘요.” “응, 그럴게.” 우리 집 ‘보일러천사’ 문명호 아저씨에게 즉시 신고했고 아저씨는 두 시간 안에 와서 부품을 교환하여 고치고 갔다.
우리 집 수압이 너무 세서 일어나는 일이라기에 수도 계량기를 열고 들어오는 수량을 절반으로 줄였다. 혹시나 싶어 우리 집 계량기들이 어디 있는가 보스코에게 물어봤다. 다행히 ‘수도는 마당 구석’, ‘가스는 뒤꼍 보일러실 입구’, ‘전기도 뒤꼍에’라고 답한다. 대충은 알고 있었다.
우리 아들들이나 가까운 친구들은 행여 내가 먼저 세상 떠나면 저런 남자 혼자 어쩌나 하는 게 제일 큰 걱정이란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자 어떤 친구는 ‘살아있는 사람 꺽정 말고 안심하고 가셔. 잘만 살아가더라고.’ 서운하지만 참 고마운 조언이다. 오늘 저녁에 바티칸 대사관에 정부 대표로 와서 축사를 한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장관 훤한 신수를 보니 그 말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저녁 7시. 주한 교황청 대사관에서 스웨렙 대사님이 새로 부임하셨고 바티칸 외교부 장관 갤러거 대주교도 방한 중이라 축하 리셉션을 하는데 초대장이 와서 갔다. 외교장관은 보스코가 작년 대통령 특사로 갔을 때 각별히 도와주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다.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반도 문제를 (특사단의 요청 그대로) 트럼프에게 꺼내고 설득하던 얘기를 들려주며 ‘그게 지금은 현실이 되어 참 기쁘다’는 얘기를 하였다. 대주교의 전체인사에서도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축원과 바티칸의 노력에 집중되었다.
김희중 대주교님을 비롯한 주교들, 예수회 관구장과 분도회 아빠스를 비롯한 수도회 장상들, 내가 좋아하는 도종환 장관, 청와대 대변인, 그리고 이백만 대사의 딸도 만났다. 주한 외교단 대사들은 누가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한 10여 년 전에는 이런 행사를 내 손으로 많이도 치르고, 많이도 찾아다니다 지칠 때 쯤 소임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오랜만에 외교단 연회에 가니 감회도 좀 새롭다.
오랜만에 김대주교님(보스코의 3년 후배)과 함께
이 대사관에서 50여년 일해 온 첼시오씨(보스코 2년 후배)와…
대사관에서 일하는 수녀님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