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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참 의리 없는 ‘남초 성인’
  • 전순란
  • 등록 2018-07-27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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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4일 화요일, 맑음


하지(夏至) 바로 전에는 4시 반쯤 일어나 밖에 나가도 세상이 대충 보였는데 이제는 5시 5분쯤 되어야 작물과 풀의 분간이 간다. 아침이 하루에 5분 정도씩 늦어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간밤에 ‘님이 가시는 소리’에 뜬눈으로 지새우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는데 그렇게 매정하게 뒤도 한번 안 돌아 보고 떠난 님은 자취도 없다.



밭고랑 마다 가득한 개비름을 캐냈다. 낫으로 베낼 수도 있었지만 하등 식물일수록 몸체에서 한 가닥만 남아도 자신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발휘해서 되살아나므로 뿌리채 찍어내야 한다. 얼마 전까지는 비름나물이 승했고, 그 전에는 바랭이와 도깨비방망이가 빈터를 대부분 차지했었다. 우리 집만 그러나 화산댁 밭을 들여다봐도 우리와 똑같은 개비름 세상이다. 그 작은 씨앗들이 무슨 재주가 있어 동네방네 사발통문을 돌리고, ‘기미년 3월 1일 정오’처럼 동시에 일어나나?


해나기 전 밭고랑을 매고 해가 떠오르자 배나무 밑으로 들어가 어성초 밭을 맸다. 신선초가 천하를 통일하고서 어성초 밭마저 침탈하고 있어 신선초를 모조리 뽑아내면서 몸살 하는 어성초들을 해방시켰다. ‘벼이삭이 주인 발소리를 들으며 큰다’지만 다른 곡식이나 푸성귀도 마찬가지다. 다섯 시부터 여덟시까지 여러 날 밭을 매만져 주니 이제 좀 매꼬롬 텃밭의 티가 난다.



진이 엄마가 블루베리 마지막 선별 작업으로 지쳐있어 콩국이라도 해주려고 흰콩을 담갔다. 담그다 보니 걸리는 사람이 많다. 소담정 도메니카 몫 한 줌 더, 유영감님 몫으로도 한 줌 더, ‘저녁 먹으러 오라고 미루네도 불러야지’, 그래서 두 줌 더, 그런데 저녁이 되자 ‘무더위에 지친 몸으로 국수 한 그릇 먹으러 먼 길 오라 하기가 미안해서’ 귀요미네 몫은 냉동실로.


아침에 김을 매는데 유영감님이 들여다보시며 “호박 있으면 하나 주고!” “왜 호박 안 심으셨어요?” “어데, 심었는데 너무 가물어 말라 죽어삐렀어. 된장찌개는 평야 호박이랑 양파가 꼭 들어가야 하는 기라.” 나는 ‘우리 집 농사 선생님께 당당하게 내가 키운 미스 호박을 따서 앵겼다.



40도를 넘는 부엌에서 콩 껍질 까고, 삶고, 갈고, 베보자기로 꼭 짜서 (이 동네에서는 짜지 않고 간 것을 비지채 그냥 넣으므로 좀 텁텁하다) 병병이 냉동실에 넣어 식혔다. 우리는 저녁을 6시에 먹고, 진이네는 7시에 해다 주고, 유영감님께는 꾀가 나서 ‘콩국수 드시겠느냐?’고 전화로 물으니 “내가 워낙 면을 즐겨해. 하루 네 끼 먹어도 좋아!” 그래서 국수를 일인분 더 삶았다.


길고 더운 여름날도 이렇게 해서 다갔다. 모래 제주도에 가져갈 ‘호박꽃 튀김’을 장만하러 호박 숫꽃 따느라 보스코와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같은 호박덩굴을 뒤지는데도 둘이 찾으면 더 많이 딴다. 보스코는 초딩 막내가 사명감을 갖고 엄마를 돕듯이 열심히 잎새로 숨은 호박꽃을 찾아 나한테 일러바친다. 열 명이 먹을 것으로 40개는 땄으니 일단 충분하다.



보스코가 요즘 작업에 발동이 걸려 피서를 번역으로 하는지 꼼짝 않는다. 아우구스티노의 “혼인과 정욕”이라는 책을 번역해서 윤문하고 주석하는 중이다. 저 먼 날 수도자요 성직자로 산 분이 ‘혼인’에 대해 뭘 알았는지, 제 바로 알기나 했는지 궁금하다.


하기야 그 ‘성인’은 열여섯 살에 여자와 동거생활을 시작해서 아들도 낳았고, 밀라노 황실교수로 출세해서는 양가집 규수와 정식결혼을 하겠다고 나이 서른에 열두 살짜리와 약혼을 하면서 15년이나 데리고 살던 애엄마를 쫓아냈다. 그러니 여자는 너무 잘 알았고 의리는 너무 없었던, 요샛말로 ‘남초 성인’이다. 그러다 홰까닥 돌아서 만사 제치고 출세 포기하고 수도생활에 들어갔으니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요 학자를 모셨지만… 아무튼 늦게서 독신생활에 들어간 본인에게는 ‘정욕’이 죽을 때까지 고민고민하는 문제였는지 섹스와 발기와 절정이 원죄의 죗값이라고 두고두고 외쳐서 21세기 독신자들에게까지 물려주었다는, ‘전설따라 삼천리’! 




그래도 산속이라 해가지고 나니 선선하다. 잠자리에 들려다 콩국하고 남은 비지를 저렇게 두면 쉬겠지 싶어 비닐봉지를 들고 인규씨네 우사엘 갔다. 한밤중이라 개는 난리로 짖어대고, 큰송아지가 눈을 껌뻑이며 “으흐 뭐, 이런 것까지!”하며 쩝쩝 만나게 야참을 한다. 


내려오는 언덕길 무논에 개구리는 관객도 없는데 합창을 하고 심심하던 차에 온달로 커가는 달님이 나를 보자 ‘친구 만났다’며 밝게 웃어준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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