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7일 금요일, 한없이 맑음
수녀님들과 새벽미사를 드리노라면 참 편안하다. 대주교님이 한국에 오신지 두 달밖에 안 되어 엽렵한 빵고가 이탈리아말 미사경본을 준비했는데 한국말로, 완벽한 발음으로, 미사통상문 부분을 집전하셔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 나라를 사랑하고 함께 하려면 제일 기본적인 게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인 언어다.
그분의 겸손한 자세와 선량함,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은 그분이 우리 앞에서 보이는 언행 하나하나에서 나타나기에 수녀님들은 감격했다. 빵고가 복음강론을 통역했다. 어렸을 때 우리 네 식구 중 이탈리아 말을 제일 잘해서 우리는 걔를 ‘조잘이’(chiacchiarone)라고 불렀다. 언어란 타고난 재능으로 보스코와 빵기로 해서 빵고까지 연결되는 고리다. 나는 전씨(全氏)여서 집안은 배달민족의 언어를 제외하고는 다른 말을 거의 모르는, ‘언어적 애국자’이고…
오늘 대주교님이 저녁식사에서 들려준 우스개. ‘머리를 깎아야 한다’며 ‘어딜 가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직원이 전화하면 이발사가 출장와서 해드린다’고 하더란다. 당신은 이발소에 가서 하고 싶다니까 빨강줄 파랑줄이 빙빙 돌아가는 곳을 찾으라 해서 대사관을 나가 한참을 걷다보니 빨강줄 파랑줄이 빙빙 돌아가기에 들어가서 잘 깎고 오셨단다. 그 동안 모신 대사님들과 너무도 달라 ‘도대체 어떻게 통했느냐?’고 묻기에 ‘이발사가 완벽하게 영어를 하더라’고 대답하셨단다. 무슨 얘기를 나눴을까 궁금해 하던 우리들에게 이발사와의 비밀을 들려주셨는데 “0K.” “Shampoo” “Thank you” 가 전부였단다. 우리 전씨집 영어 수준이 딱 그 정도다.
당신이 비서로서 모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즉위하신지 며칠 안 되어 찾아가 방 문을 두드렸단다. ‘구두를 주십쇼.’ ‘내 구둔 왜?’ ‘닦아 드리게요.’ ‘내 구둔 내가 닦아왔는데?’ ‘그래도 그냥 주시죠.’ ‘난 늘 내 구두 내가 닦아 왔어요. 내 구두 닦는 직업을 교황 됐다 해서 빼앗아가면 안 되죠.’ ‘……’
“지금도 아침마다 교황님은 당신 구두를 신나게 쓱싹쓱싹 닦으실 거예요”라는 대사님의 마지막 말씀에는, ‘내가 저분처럼 살지 않으면 난 지옥 가기에 딱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던 존경심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었다. 알려졌듯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대대로 교황들이 신어오던, ‘프라다의 붉은 꽃신’도 마다하시고 시커멓고 뒤축이 삐뚜루 닳아진, 아르헨티나에서부터 신어오신 단벌구두가 전부란다. 비서에게 들리던 당신 가방도 친히 들고 다니신다.
아침엔 하얀 빵을 노랗게 구워 나누어 먹고, 참치와 도마도 치즈를 넣고 점심도시락을 싸서 10시에 예약한 ‘거문오름’을 걷기 위해 9시에 집을 나섰다. 제주도민이 다 된 빵고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산간 도로를 돌고 돌아 제주 동쪽 끝에 있는 ‘유네스코 제주세계자연유산’ 센터로 갔다.
‘거문오름’은 지리산 칠선계곡 등산로처럼 예약제여서 예약한 사람만 가이드를 받으며(통역은 빵고 몫)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다. 50명이 30분 간격으로 ‘1.8km 코스’와 ‘5.5km 코스’ 그리고 ‘10km 코스’가 있었는데 우리는 두 시간 반을 걸었다.
곶자왈 땅은 흙이 없어 나무가 바위를 끌어안고서 줄기를 지탱한단다
검은오름 정상에 올라 멀리 한라산과 오름들을 한눈에 훑어보고, 백록담 네 배의 크기라는 분화구까지 걸어 내려가서 용암협곡, 붓순나무 군락지, 숯가마터, 한여름에도 밖과의 온도차이로 인해 땅속 통로를 통해 흰 수증기가 보인다는 풍혈에서 땀도 식히고, ‘수직동굴’에서 불어 오르는 한기에는 빨갱이라 해서 산채로 던져진 가엾은 제주 양민들의 넋에 대한 한스러운 원성이 서려 있었다. 오늘 서울에서 장례를 치른, 노의원의 한스러운 탄식이 들리는 듯도 하고 '‘검은오름’에 노의원을 묻고 온 기분도 들었다.
2시간 반을 걸어 센터에 돌아와서는 싸간 도시락을 꿀맛으로 먹었다. 오후에는 바다에 가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나이가 있어 하루에 두 탕을 뛰기는 무리여선지, 어제 밤 무더위로 잠을 못 이루어선지 대주교님은 우리 엘리가 선물해드린 모시잠옷을 입고 낮잠을 주무시고는 ‘그 옷 덕분에 한국사람이 다 됐다’고 좋아하셨다.
나는 돌아오자마자 시장에 가서 장을 봐다가 저녁을 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수녀원 공동체 전부가 움직이는 모습이 아름답다. 식사 후 2시간 가까이 궁금한 얘기를 대주교님께 묻고 또 묻고, 사랑스런 질문에 성심껏 답하는 그분 모습은 옆에서 보기만도 뿌듯하다. 오늘 저녁식사로 내 땀노동도 끝나고 힘은 들고 피곤했으나 휘영청 보름달이 떠오르는 금악길을 기분 좋게 걸어 내려와 숙소에서 일기장을 폈다.
오늘 보름달은 유난히 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