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1일 토요일, 맑음
지리산에서 잘라온 부추. 너무 곱고 너무 부드러워 볼 적마다 우선 베고 본다. 자주 베지 않으면 굵어지고 뻗쳐지므로 안 먹더라도 베내야 한다. 부추가 크는 속도가 우리의 먹는 속도를 늘 추월한다. 휴천재 텃밭의 거의 모든 채소가 우리 두 식구가 소비할 양을 넘기에 재배하는 많은 채소가 그냥 버려진다.
올라올 때도 이웃 아짐들과 나눠 먹겠다고 갖고 오지만 대량생산에, 농약에, 제초제에, 성장촉진제에 쭈쭈빵빵으로 키워 매끈하게 스티로폼 접시에 담겨진 ‘마트 채소’에 익숙한 도시인들에겐 내가 키워온 채소가 눈에 찰 리 없다. 나도 때로는 꾀를 부려 아예 심지 않고 이웃에서 얻어먹을 때도 있으나 농약과 성장촉진제를 친 것은 아예 피한다. 그래도 고맙게 제네바 우리 꼬마들은 할머니가 키워서 담가 보내주는 반찬을 자랑하기에 되레 고맙다.
점심에 ‘하누소’에서 ‘수유4인방’이 만나 점심을 먹었다. 이미 엄엘리 부부를 만났고, 한목사 부부를 따로 만났으면서도 이엘리가 주선한 모임에 다시 모여야 ‘4인방’이 완성된다.
식사 후 문익환 목사님 기념관 ‘통일의 집’엘 갔다. ‘통일의 집’은 민족의 아픔과 희망이 극단적으로 공존하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숙제인 민족통일을 위해 헌신한 문목사님과 부인 박용길 장로님의 삶이 곳곳에 간직되어 있다. 지난 6월 1일에 재개관하여 우리가 이번 방문하게 됐다. 박장로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자주 찾아뵈었는데 장로님이 안 계시니 아무래도 쉽게 찾게 되질 않는다.
남북 정상회의가 열리고 남북화해와 통일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이때, 문목사님 내외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두 분 표정이 눈에 선하다. 감옥에 가셔서도, 가슴에 수인번호 ‘6943’을 붙이고도 환하게 웃고 계시는 사진을 보면, 신앙인이라면 근본적으로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는 긍정적인 삶을 살라는 모습 같다. 두 엘리도 통일과 민주화에 관심이 커서 이곳저곳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데 특히 이엘리는 미리 문목사님에 관한 예습까지 하고 왔다고 한다.
따님 문영금 관장, 연출가 문호근씨의 부인이자 최초로 국립오페라단 단장을 지낸 정은숙 세종대 교수도 합석하여 다과를 나누며 지난 시간을 회상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산 같은 스승님을 두었던가 새삼 감사드린다.
6시에 우이성당 토요(특전)미사를 갔다. 미사 후 주임신부님은 이번에 이임 간다면서 보스코에게 인사를 했다. 생전 처음의 본당주임 자리였고, 소수나마 성당 나오는 아이들에게 특히 자별하게 대하시던 사목이 기억에 남겠다.
저녁은 아래층 구총각 남매와 우리 세 식구가 내가 지리산에서 장만해온 콩국으로 국수를 해 먹었다. 신세대의 세계도 엿보고 한 살 차이 남매가 가질만한 갈등관계도 흥미로웠다. ‘고3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오빠가 갈수록 유치해진다’는 여동생의 평가. 그 처녀가 모르는 사실은 남자는 워낙 태생이 유치하고 어리다는 거다. 그리고 나이들 수록, 늙어갈수록 더욱 더 유치해진다는 점이다.
쓰레기를 치우다 보니, 엊그제 비로 이 골짜기는 제법 열기를 식힐 만큼 식었고, 골짜기의 바람을 쏘이며 밤을 보낼 만해졌다. 서광빌라 아짐들이 모여 앉은 곳으로 갔더니, ‘언제 지리산엘 가느냐?’고 묻고는 일제히 나를 향해 바람을 부쳐 준다. 문정리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여자들은 거의가 과부로 남았고 그니들은 서로 기대고 허전한 옆구리와 외로움을 부채로 부쳐주는 중이다.
남자는 유치도 하고 빨리 죽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부부 중에서 사내들이 먼저 떠나도록 배려하신 건 어쩌면 창조주의 자상하신 섭리다. 남자란 평생 엄마와 아내, 딸이나 며느리 같이 여자들에게서 보살핌 받아야 할 종족으로, 더구나 늘그막에 혼자 남아 자기를 건사할 능력이 도대체 없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