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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친구야, 비 좀 내려도! 산사람은 먹고 살아야 할 게 아이가?”
  • 전순란
  • 등록 2018-08-17 10:36:45
  • 수정 2018-08-17 16:5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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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5일 수요일, 맑음



내가 호박을 따러 가면 있던 자리에 알맞은 크기로 자라 오른 호박을 제 때에 적발해 따오는데 왜 딴 사람들은 못 찾아낼까? 그러다 내 눈에도 안 띄게 잠수하다 어떤 날 어른 머리통만큼 커버린 호박을 보면 나로서도 난감하다… 따야 하는지 늙혀야 하는지.


늙히느라 그냥 두면 벌이 많은 지역이어서 호박껍질이 부드러울 때 속에다 알을 낳아 놓기 십상이다. 겨울이 되어 호박죽을 쑤려 노랗게 익은 호박을 절반으로 쩍 갈랐을 때 벌레들이 오글오글 가득한 장면이 수도 없이 많다. 속을 다 파먹고 껍질만 남은 호박이라니!


말벌집을 통째로 따다 그 속의 애벌레들을 구워 술안주를 하든가 벌집째 소주에 담가 마시는 ‘몬도가네’ 남정들마저도 호박속의 애벌레에는 별 관심을 안 보인다. 그래도 늙어가는 호박 역시 ‘산목숨’이어서 오늘 새벽 신문지로 똬리를 접어서 텃밭에 내려가 한 개씩 앉혀주었다.


호박에 똬리만 해주고 올라오겠다 작심하고 내려갔어도 풀을 보면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된다. 우선 풀섶에서는 덩쿨이 호박을 맺지 않고, 보스코더러 예초기를 돌려 달래면 호박넝쿨을 사정없이 잡아당겨 뒤집어 놓거나 실한 넝쿨들을 잘라버려 호박농사를 망쳐버린다. 하는 수 없이 내가 호박넝쿨 주변의 잡초를 낫질해서 뽑아야 했다.



풀을 베거나 뽑는 일은 별로 고달프지 않지만 풀뿌리에 지은 집을 파손당한 개미들이 열받아서 떼로 덤비는 인해(?)전술은 가히 살인적이다. 모기는 소리를 내니까 공격당하는 방향이라도 가늠하고 피하는데, 옷 속으로 잠입한 살인특공대 개미는 등이고 배고 겨드랑이고 사방에서 동시다발로 공격하므로 긁어대느라 정신을 못 차린다. 오늘도 개미집을 여럿 보았고, 발견한 순간 얼른 풀뿌리를 살그머니 제자리에 내려놓곤 했다.


‘성모승천대축일’이어서 공소예절은 없고 본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갔다. 공소회장 토마스의 부탁대로 동네 여교우 가밀라 아줌마와 안젤라 아줌마를 우리 차에 싣고서 함양성당으로 ‘판공 보러’ 갔다. 도정의 글라라 부부와 실비아도 본당미사에 왔다.


마리아가 느닷없이 임신한 몸으로 (아마 동네 사람들 눈총이 두려워) 사촌언니 수발하러 간다는 핑계로 먼 유다 지방까지 찾아간 얘기가 복음에 나온다. 아기 가질 가망이 전혀 없는 늘그막에 아들을 배어 한참 업업되어 있던 엘리사벳이 사촌동생의 심상치 않은 배를 보고서 건네오는 축하 말이라니! “내 주님의 어머니가 나한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이람? 보려므나, 네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내 뱃속 아기가 한바탕 요동을 치는구나!” (너무 상상적 아닌가?)



약혼자 요셉이 자기를 내치면 부정을 저질렀다고 마을 사람들한테 돌맞아 죽기 십상이고, 설령 맘씨 착한 요셉이 자기와 아기를 거둬주더라도 평생을 두고 그 거북한 시선을 어찌 견디나 고민이 태산 같을 텐데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다니! 저만큼 당찬 여자라면 오늘 하늘로, 아들 옆으로 승천하실만한 자격이 충분하시구나 싶다.


8월 15일 대축일 미사 후에는 보통 본당에서 교우들에게 점심을 장만하는데 워낙 날이 덥다 보니 다 생략하고 떡과 미숫가루물을 나눠주었다. 공소회장 부부가 출장을 간 터라 공소식구들에게 보스코가 어탕국수를 쏘고, 안젤라 아줌마가 ‘콩꼬물’에서 눈꽃빙수를 냈다.


내 친구 글라라 시신을 동네 한전병원으로 옮기느라 4일장으로 한다니 내일 올라가기로 작정하고서 읍내 차부에서 버스표를 사들고 휴천재로 돌아왔다. 오후 내내 날씨가 어찌나 덥고 찝찝한지 비 오기만 학수고대하는데 자정이 다 돼서야 번개를 마냥 번쩍이며 소나기를 조금 내리다 만다. ‘강수량 10mm!’ 그래도 간간이 시원한 기운이 돌고 흙냄새가 코끝에 풍기기도 한다. 


글라라를 위해 바치던 저녁 ‘위령기도’가 “친구야, 하늘에 올라갔으니 비 좀 내려도! 산사람은 먹고 살아야 할 게 아이가?”라는 기우제(祈雨祭)로 바뀌었다. 어제 죽은 친구한테 오늘 벌써 통사정을 하며 비를 비는 이것도 가톨릭에서는 ‘모든 성인(聖人)의 통공(通功)’(신앙인들이 현세와 내세에 기도로 서로 돕는다는 믿음)이라 부르겠지?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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