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7일 월요일, 하루종일 비
태풍이 지나간 지가 언젠데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장마보다 센 장대비가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앞산은 하얀 구름 띠로 하루 내내 벗고 가리며 뽐을 내는 중이다. 테라스의 거미줄은 송알송알 맺힌 물방울이 진주알 같고, 식당채 창틀을 타고 오르는 여주는 찬란한 오렌지색 열매를 자랑하고, 비가 온다고 땡치기만 할 수 없어 가랑비를 틈타 꿀 따러 나온 벌과 (벌새 비슷한) 꼬리박각시나방은 부지런히 날갯짓을 하는 휴천재 아침 풍경.
내일 산티아고로 순례를 떠나는 스.선생님이 오랫동안 한식을 못 먹을 것 같아 점심식사나 하러 오시라고 부부를 초대했다. 그동안 순례길을 준비하느라 서너 달 하루에 20km 이상 산길을 걸으며 몸을 만들었는데 그 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배가 등에 붙고 걸음은 힘차졌다. 우리 보스코도 산티아고를 보내면 저 ‘임신 9개월’이 안으로 들어갈까?
나로서는 특히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무리 남자라도 배가 튀어나오면 남 앞에 부끄러워할 법도 한데 보스코는 그럴 기미가 도무지 안 보인다. 사진을 찍거나 남이 보면 유난히 배를 내밀고, 성무일도를 할 때에는 불룩한 배주름에 기도서를 받쳐 놓고서 두 손을 펴들고 주님의 기도를 올리곤 한다.
브라자를 이탈리아에서는 ‘젖받침’이라 하는데 자기 배는 성무일도서를 받쳐주는 ‘책받침’이자 두 손을 깍지 껴 올리면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손받침’이라며 자랑하니…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해 눈빛만 봐도 그의 모두를 아노라 큰소리치는 나마저도 그런 속마음은 모르겠다.
오늘은 ‘모니카 성녀’ 축일. 내 주변에는 모니카가 여럿 있고 모든 모니카가 수호성녀의 기질과 가르침대로 자녀교육 하나는 확실하게들 시키고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모니카들은 모조리 대가 센 여자들이어서 신자가 자기 수호성인을 닮는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남해 모니카 언니는 깔깔깔 웃음소리가 항시 집안을 울리고 세 남매를 야물게 키워내서 누구라도 부러워할 인재로 삼았다.
인천 ‘디모니카’의 모니카에게 축하 전화를 했더니 일본에 사는 큰딸이 이사한다기에 도우러 갔는데 우리나라 무더위는 일본 더위에 비해서 더위도 아니더란다. 덥고 끈끈하고 숨 막히는 세상에서 죽을 것 같다. 엊그제 귀국하니 천국이 따로 없더란다. 한국의 여름기후가 천국이라니! 그러면서 보태는 얘기.
친구수녀가 무슨 수련회가 있어 강원도에 있는 수련소엘 갔는데 ‘교황대사님이 오셨다’기에 저쪽, 몸채가 그럴듯한 분이 계셔 ‘저분이구나!’ 했단다. 단체식당 입구에서 어떤 서양 사람이 수저를 나눠주고 수녀님들의 안내를 돕는데, 사람이 겸손하고 부드러워 수사신부님인가 했더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분이 새로 오신 교황대사님이시더란다!
그걸 본 많은 수녀들이 “우리, 수도생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면서 부끄러워하더라나.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보기 힘들던 고위성직자의 언행을 뵈었다고도, 더구나 그런 교황대사님은 첨 봤다고들 기뻐하더란다. 수에레브 대주교님이 교황님의 개인비서를 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님 언행을 지켜 보고서 “나, 저분처럼 안 살면 지옥가기 딱이구나!” 하셨다던 고백을 제주에서 내게 들려주신 기억이 떠오른다.
읍내 모니카에게도 전화를 했더니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소식! 어제 빗길에 서울을 가다 고속도로에서 차가 미끄러져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고 도로 밖으로 굴러 형체를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차가 망가졌는데 운전자는 에어백이 터져 찰과상 정도로 끝났단다. 남편의 사고 전화를 받으면서 “여보, 당신 나한테 전화하는 거 보니 아직 안 죽었네?” 했다는 모니카, 역시 대찬 여자다. 홍 원장님은 오늘 아내의 영명축일을 천국에서 맞으며 축하인사를 내려보내기가 좀 뭣해서 작별을 한참 미뤘나보다. 금실 좋기로 소문난 부부다.
오후에 내려가 본 휴천강 물줄기는 어제에 비해 좀 가라앉았고 몇 해 전 절반이 떠내려간 옛 다리 밑으로는 어제의 황토강이 할퀴고 지나간 돌바닥과 물살에 잠겼던 초목이 처연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강물을 내려다보며 ‘배를 타는데’(다리에서 물살을 골똘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내가 배를 타고 가는 것처럼 다리가 움직여보인다) 갑자기 떠오르는 상상.
보수꼴통들의 소원대로 한반도에 전쟁이 다시 나면, 미국정부 명단에 들어 있다는 군속, 친미정치인, 재벌, 지식인, 졸부들은 미국으로 일본으로 튀어버리고, 이 땅밖에 뿌리박을 데 없는 민초들만 남아 저 강바닥 같은 폐허에서 다시 일어서려니 하는 생각이 들며 어깨가 부르르 떨리는데 분노인지 슬픔인지 까닭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