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30일 목요일, 비
늦은 밤부터 조용히 비가 내린다. 어제 서울에 물 붓기에 싫증이 난 물방울들은 내 취향과 같아서인지 오늘은 지리산 골짜기로 돌아와 몸을 쉬나보다. 오늘도 비는 계속 오락가락하고 하늘의 구름은 온갖 모양으로 그림을 그려대니 하늘구경만도 바쁜 하루다.
‘비가 올 줄 알고 내일하겠다고 일을 미뤘어요?’ ‘그건 아닌데. 여하튼 어제는 하기가 싫었어.’ ‘그럼 비 멈추면 오늘 할 거예요?’ ‘나중씨, 아직 출타 중이야.’ 이러다간 암만해도 ‘승질 더러운’ 내가 축대 밑에 가서 사다리 놓고 잡목과 잡초를 마저 베야 할 것 같다.
아침을 먹고 식당채에 과일을 가지러 내려갔다가 폭탄이 투하된 듯한 부엌광경을 보고는 나도 놀랐다. 설거지 된 그릇들은 우선 제자리에 넣고, 되는대로 쌓였던 소쿠리와 스텐그릇은 크기대로 맞추어 싱크대 안으로 정돈하고, 바닥청소를 하고, 행주는 빨아 널고, 미처 냉장고에 못 넣었던 채소는 쓰레기통에…
이럴 때 누군가 와서 식당채를 들여다보았더라면 어땠을까? ‘평소에는 나 안 그래요.’라는 변명이 통할까. 그래서 오늘 복음이 ‘깨어 있어라! 주인이 언제 올지,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여자 손님이 언제 들여다볼지 모르는데 부엌 꼴이 웬 말이냐?’ 부엌에서 한참을 해찰하고 올라가니 ‘뭐하고 오느라 그리 늦느냐?’고 그가 묻는다. 내 대답은 ‘그냥!’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서.
얼마 전 엄엘리가 화장품 비슷한 작은 병을 하나 주었다. 냄새를 맡아 보니 향기도 좋고 바르는 감촉도 그럴듯해 얼굴에 정성스레 펴 바르고 마사지까지 했다. 그런데 너무 끈적이고 마를수록 얼굴이 땡겨져 세수를 해버렸다. 아무래도 정체가 수상해 엄엘리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이건 샴푸예요!’ 나더러 문맹이냐고 놀리지는 말아야 할 것이 병에 아무 글자도 붙어 있지 않았으니까. 보스코는 목욕할 적마다 병에(국산마저도) 가득히 씌워진 프랑스어와 영어를 못 알아들어 내가 커다란 매직 글씨로 ‘샴푸’와 ‘린스’를 적어둔다.
점심을 일찍 차려 먹고 오도재를 넘어가 희정씨네 집에서 윤희씨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8월이 가기 전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고 싶었다. 오늘처럼 우울한 날 고운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떠나는 한석규의 아름다운 우울함에 그 집 창밖의 빗소리가 더는 우울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우울한 영화는 그 집에서 마저 본 『책을 읽어주는 남자』였다.
‘악의 평범성!’ ‘상사의 지시대로 자신의 일에 성실한 게 왜 잘못이냐?’는 한나의 반문에 아연해진다. 자신의 죄를 깨닫기 전엔 죄가 아니다. 지난 정권의 군부와 정보원, 청와대와 사법부의 적폐를 두고 요즘 당사자들과 보수언론의 두호를 보면, 자기들이 저지른 짓이 죄가 아니다.
저녁에 내 영화감상을 듣고 있던 보스코는 “자기 잘못에 양심이 내린 유죄판결이 곧 형벌”이라는 어느 교부의 말을 인용한다. 소설과 영화 속의 여주인공은 문자를 깨쳐 글을 읽게 되면서 자기가 진심으로 사랑을 주었던 미하엘이 마지막 보인 냉정함에서 드디어 자기를 돌아보았을까? 그니는 20여 년 형을 살고 교도소를 출소 하는 바로 그날 목을 맨다. 사람이기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지만 자기한테서든 남한테서든 용서받아야 살 수 있다. 보스코가 내게 간혹 들려주는 신학 강의 한 토막: “지옥이란 다름 아닌 자기후회, 영원히 용서할 수 없는 자기 증오”란다.
수용소 희생자들의 신발
밤이 깊어가며 빗줄기가 굵어진다. 암담하다. 밤 10시! 보스코는 벌써 입과 코로 기차를 타고 가끔 기적소리까지 내며 철로를 달리고 있다. 남북철로 연결상황을 남북대표가 의논도 못하게 미군이 막았다지만(대한민국은 미국 앞에 과연 주권국가인가?) 보스코가 탄 꿈의 열차는 중강진을 지나 곧 국경을 넘을 것이다.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나 모스크바, 파리를 경유하여 종착역인 로마 중앙역 테르미니까지 갈려면 밤새 달릴 테지…
그런데 아내인 나는 보스코 곁에서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처럼 그 시끄러운 열차가 달리는 다리 밑에서야 비로소 깊은 잠이 드니 세상엔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이도 일어난다, 특히 부부간에는. 인간을 쌍으로 지어내신 하느님도 간혹 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쟤들, 내가 정말 저렇게 만든 얘들이야?’ 하실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