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31일 금요일, 비
비가 쏟아지다 가끔 파아란 하늘이 빼꼼 내려다본다. 이런 날 제일 좋은 일은 ‘책 읽기’. 얼마 전 선물 받은, 문영석 교수님의 『교육혁명으로 미래를 열다』라는 ‘피로 사회에서 본 놀이신학의 지혜’가 담긴 책을 오늘 펴서 읽었다. 그간 캐나다에서의 나그네살이를 잠깐 접고, 한국에 와서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다 보니 한국의 병든 교육현장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곳에 살던 사람이라면 ‘다들 이렇게 사나 보다’ 생각하는데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보아왔던 사람들에게는 우리 아이들이 너무 가엾다. 징글징글하게 일만 하던 사회는, 새 정부의 노동정책으로 어른들은 억지로라도 ‘주 52시간 근무’로 어느 정도 쉬는 게 일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라도 품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은 아직도 하루에 15시간씩 학원과 학교에 매달려 ‘공부도 안 하고 놀지도 못하면서’, ‘미래에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과 존재하지도 않을 직업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앨빈 토플러의 입을 빌어 말한다.
이렇게 청소년기를 보내고 그 긴 공부 끝에 ‘원하지도 않은 직장에서 (대부분 그런 직장마저도 못 찾고) 하기 싫은 일을 죽지 못해 하다니…’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사는데 우리의 현 상황은 ‘불행을 향해 부나비처럼 달려드는’ 사회상을 만들고 있다. 느티나무 독서회의 다음 읽을 책이 박성숙 작가가 쓴 『독일 교육 이야기』인데 내년에는 우리 교육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도 문교수님의 책을 읽자고 제안해야겠다.
창밖으로 내다보는 세상은 앞산과 휴천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흰구름만 갖고서도 대자연은 무궁무진한 상상을 화폭에다 그려낸다. 그 그림만을 바라보고 있어도 우리의 머릿속은 무한한 상상으로 채워진다. 사람들은 나더러 ‘지리산 속 닫힌 세계에서 답답하지 않는가?’ 물어오지만 오늘처럼 ‘비오는 날의 수채화’를 내다보며 책을 읽는다는 건 무한한 세계와 만나는 여유다. 글을 안다는 건 우주만큼 넓은 정신세계와의 소통이고 눈뜨고 바로 만나고 보는 일이니까…
그러니 어려서부터 책 읽는 일과 친숙해지는 건 평생을 지내며 누릴 커다란 유산이다. 내 어렸을 적 안성 공도중학교 시절. 염소에게 풀 뜯겨라는 엄마의 심부름이 떨어지면 산언덕 무덤가에 앉아 부드러운 풀을 짐승에게 뜯기며 나는 몇 시간이고 책을 읽었다, 건너편 교장사택에서 엄마가 ‘순란아, 밥 먹어라!’ 부를 때까지. 갓 시작하는 사춘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내 인생에 전개될 꿈을 책 속에 묻던 시절이다.
조카님이 마련하는 패션쇼
우리 손주들은 나처럼 산언덕 무덤가가 아니고, 멀고 먼 타국에서 고국의 책들을 읽는데 재미를 붙인다니 할머니로서 고마운 일이다. 한국에서는 유치원부터 핸드폰을 사주는데 시아는 초딩 6년인데도 핸드폰이 없고, 게임도 하루에 20분, TV도 30분으로 제한된다. 나머지 시간은 노는 일이나 책 읽기로 보낸다, 그것도 엄마랑 함께!
스마트폰 중독이나 TV중독도, 마약중독이나 알코올 중독처럼 뇌를 손상시켜 기억용량이 발달도 하기 전에 감소시키고, 자제력을 잃게 하여 자칫 ‘인터넷 폐인’이 된다는데, 전체 고등학교까지 한국학생의 17.9%가 ‘스마트폰 중독 위험군’에 속한다는데… 놀이를 통해서 아이들을 치료하여 ‘SNS중독’에서 오는 갈등, 공포, 적대감, 공격성을 많이 해소한단다. 아무튼 두 손주 시아 시우는 ‘IT후진국’(?)에서, 40년 전 지들 아빠네 시대에 살고 있어, 할미의 마음이 놓인다.
점심에 소담정 도메니카가 와서 함께 식사를 했다. 산속에서 혼자 살다보면 우울한데 비오는 날은 특히 더할 게다. 함께 생명의 식탁을 나누고, 응어리진 마음속 이야기도 나누다 보면 이웃이 자매가 된다. 지난주 뿌린 무씨도 소담하게 싹을 틔웠다.
보스코 서재의 천정 전구 하나가 망가졌다. 실내용 사다리를 놓아도, 보스코처럼 작은 키로 팔을 뻗어도 안 닿을 때 벽돌장보다 더 유용한 물건은 책! 토마스 아퀴나스 라틴어본 전집을 사다리에 올려놓자 전구에 손이 닿는다. 책은 읽어 마음의 양식이 될뿐더러 발디딤이 되어 전구를 갈아 끼우는 데 이바지하여 실생활에 빛을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