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24일 수요일, 맑음
내 두 눈의 백내장 수술을 하고서 안과에 마지막으로 가는 날. 무릇 병원이란 더 가고 싶은 곳은 아니지만 그동안 성심껏 돌봐 준 공안과 이수정 선생께 감사한다. 병원에 가는 길, 거친 매연 속에서도 여름을 견디어낸 가로수들이 덕성여대 단풍이나 우리 동네 ‘둘리공원’ 속의 나무들만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고운 옷으로 철바꿈을 하는 중이다.
도시 한 복판 어느 건물 한켠에 쓰지 않아 잠가둔 쪽문 앞에 어느 노숙자의 한살림이 차려져 있다. 주인은 가까운 화장실로 씻으러 갔는지, 한 끼를 구하러 갔는지 간밤을 지낸 잠자리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듯하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더워도 역시 여름이 좋다. 삭풍이 불어오는 계절이면 비닐 한 장, 신문지 한 장도 소중한 덮개가 된다.
노숙자 한 사람이 얼어 죽은 건 신문기사가 못 되고 주식이 몇 포인트 떨어졌다고 호들갑떠는 세태를 보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자유주의경제’를 ‘살인경제’라고 불렀고, 그 경제를 추종하는 크리스천들을 ‘배금주의 우상숭배자’라고 질타하였다. 달리는 ‘실천적 무신론자’라고도 불렀다.
언젠가 서울역 근처에서 무궁화꽃 종이접기를 하는 친구를 찾아갔는데, 그니와 함께 서울역 지하도를 지나고 있었다. 길바닥에 길게 늘어선 신문지 아래마다 타일바닥에 따개비처럼 붙어 있다가 구물구물 움직이는 생명들이 보였다. 저 밑바닥에서도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위대한 책임감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나는 뭔가 두려운 공격의 기운을 느끼는데, 같이 걷던 그니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끗생끗 웃어주며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넸다. 자기와 친한 아저씨가 여럿이란다.
사람 사는 게 별거 아니고, 잘났다고 내세울 것도 하나 없다는 친구의 말. ‘저이들 중에 왕년에 한끝발 한 사람도 여럿이고, 대기업에 다녔던 사람, 최고학부를 거친 사람도 많아요’ “어허, 이놈이 이래 뵈도 정승판서의 자제로서, 평양 감사 마다하고 돈 한 푼에 팔려서 각설이로 나섰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그 자리에 와서 노숙자로 눕기까지 각자에게는 얼마나 숱한 사연이 있었겠는가!
공안과 내 주치의 선생님은 ‘이제 눈은 다 나았으니 3개월에 한번씩 1년간 정기검진만 받으면 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동안 정이 들어 헤어지자니 허전하다. 그렇다고 눈이 두 개뿐인데 더 수술할 눈도 없다.
점심 후에 보스코는 가을빛에 노랗게 스러진 나무가지와 시든 꽃대를 말끔히 잘라내 손수레에 실어다 뒷산에 버렸다. 땅속으로는 구근이나 잔뿌리가 남아있어 길고 혹독한 겨울을 잘 버티어낸 순서대로 내년 봄이면 싹을 틔워 내리라.
환경운동가 이기영 교수가 강북구청에 강의를 왔다가 보스코의 집이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알고 덕성여대 앞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그분은 한마디로 기인 같다. 베를린공대에서 공학박사들 받았고, 작사 작곡에 노래까지 하는데, 아주 수준급의 노래로 애들 교과서에도 많이 올라 있단다. 제6회 천주교환경상도 받고, 환경음반이나 ‘노래하는 환경교실’로 제1회 EBS 자연환경 대상을 받기도 한 분이다.
내년 3·1절 100주년 행사에는 자신이 작곡한 노래 ‘한강은 흐른다’를 조수미 선생에게 부르도록 교섭중이란다. 환경운동에도 앞장서고 한국 토종 천년초로 온갖 약과 비누 치약 화장품까지 만들어 보스코에게 한 아름 싸갖고 왔다. 행주에서 아예 천년초 농사를 짓는단다. 그야말로 ‘노래하는 도시농부’라는 타이틀에 딱 맞는 인물이다.
보스코로 말할 것 같으면 오로지 딱 한가지 일밖에 못하는데, 이런 팔방미인을 만나면 눈이 휘둥그레져 엄청 신기해하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는 보스코의 모습이 내게는 아주 재미있다. 우리 주변엔 생긴 모습대로, 하느님이 주신 열 달란트로 열심히 일해 열 달란트를 남기는 충실한 종이 많은데 이교수도 그들 중 하나인 듯하다. 우리 주변에는 기라성 같은 환경, 민주, 통일의 일꾼들이 많아서 우리 부부는 덩달아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