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8일 목요일, 비
수도원 새벽 미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다. 긴 밤을 시름과 고통으로 뒤척이다 위로받고 싶은 분께로 새벽길을 떼어 성당 문 앞에 서면 이미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오면서 아침 공기로 차디찬 뺨엔 주르르 눈물도 흐르려니…. 아침미사에 나오는 여러 아낙들의 표정에 담긴 인고(忍苦)의 잔상, 문앞에서 그 아낙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노사제 한 분의 가슴에는 그런 아픔들이 고스란히 와 닿나보다. 짤막한 인사, 속삭여주는 몇 마디 위로, 그리고 동정어린 그분의 눈길...
내가 여태 신안동 수도원의 아침미사 후에 수십번 지켜본 광경이지만 노사제 한 분의 자비로운 그 눈길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심고에서 치유하는지 어림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젊은 수사들에게는 60년 후에 자신들이 도달해 있고 싶은 경지이기도 하다. 정말 배움이란 말이 아니고 행동이다.
가엾은 요안나를 만났다. 오늘 요안나의 첫마디. “언니, 보스코가 많이 아파.” 수복씨 삼형제 중 막내도 보스코다. 내가 시집가던 해에 중학생이었고, 보조개가 귀여운 소년으로 늘 수줍게 웃으며 날 '형수'라고 부르던 소년. 50대에 병상에 누웠다니! 그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린다. 둘째(김재균 전국회의원)도 간질환으로 세상을 떠난지 몇 해 되었다.
모친은 언제나 말없이 타인을 살피고 소리 없이 도와주고 이웃의 맘고생을 힘께 나누던 분이다. 우리 막내 훈이서방님이 교대에 입학하여 입학금을 못 냈을 적에도 아무소리 없이 등록금을 내주신 분이다. 서방님은 여러 해 후 몇 번의 월급으로 그 돈을 갚았다. 그러니까 그가 평생 교사를 하고 교장이 되어 퇴임하기까지 첫 번 밑거름을 놓아주신 분이다.
아침식사 후 보스코는 남평에 있는 광주가톨릭대학교로 등교하는 살레시안들의 봉고차로 떠났다. 오늘 그 대학교에서 “새로운 신심 및 종교 현상을 통해 평신도가 바라보는 새로운 복음화”라는 학술회의에서 보스코가 기조강연을 한다. 강연 후에 젊은 학자들(보스코가 80년대 소장으로 있던 ‘우리신학연구소’ 출신들이 대부분)의 발표도 듣고 끝날 때까지 함께하겠단다.
나는 그 길로 목포로 갔다. 엊그제 리따에게 전화를 했는데, 안 왔으면 하는 어조에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되어 보스코의 발표도 마다하고 리따를 만나러 갔다. 혼자 살면 아플 때 아무도 가까이 없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혼자 사는 사람만 알 수 있으리라. 친구는 의외로 목포경로대학연합회가 목포북교동교회에서 주최한 ‘해피실버교실 발표회’에서 옥암동성당 오카리나 팀으로 나와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조개껍질묶어'를 연주했다.
4개 교회와 4개 성당 팀 등 모두 8개 팀이 합창과 율동을 했다. 고속도로 휴게소 가판대에서나 나옴직한 노래들, ‘내 나이가 어때서’, ‘안동역에서’, ‘언제 벌써’, ‘목포의 달밤’ 등은 평소엔 별로 좋아하지 않던 노래였으나 걷기도 힘든 할메들에게서 보는 촛불의 마지막 펄럭임 같아서 안쓰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유치원 아가들의 발표회였다면 고사리 같은 율동만으로도 내 가슴에서 사랑스러움이 팍팍 솟아올랐으련만, 우중충하게 비에 젖은 낙엽같은 우리 아짐들의 힘겨운 움직임은 보는 사람도 감당하기 힘겹다? 그래도 내 칭고의 오카리나 연주는 그 발표회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그 성당식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칭고네 집으로 갔다.
그간 큰 수술도 두 번이나 이겨낼 만큼 정신력이 강한 친구인데 70이 다 되어 박사학위 논문까지 끝낸 즈음이라서 허탈한 심경이랄까? 그니와 마주앉아 노년을 어떻게 보내야할까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스코의 귀가에 맞추어 광주로 돌아왔다.
보스코는 나이를 잊은 청년처럼 진리를 찾는 격한 하루를 지내고 돌아왔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기보다, 그에게는 실제로 자기 나이를 잊고 사는 젊음이 있다. 국수녀님 전화로도 보스코의 기조 강연이 사람들 가슴과 지성에 울림을 주었다니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