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1일 수요일, 흐림
집을 지으며 심야전기 보일러실을 만들었는데(25년 전) 터가 마땅치 않았겠지만 그 위치나 좁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다. 보일러를 켜거나 고치려 들어가기도 그렇고, 보일러에 들어가는 보충수탱크마저 길가로 끌어내 철탑위에 볼썽사납게 올려놓아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거슬린다. 그뿐 아니라 실내 온도만 올라가면 보충수가 길로 넘쳐흐르고, 추운 겨울에는 자칫 빙판길을 만들어 지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민폐다.
경동보일러에 부탁을 했는데 전화도 없이 오지도 않아 지난번 기름보일러를 놓아준 임씨를 불렀다. 중장비를 하다 사고로 왼쪽 팔목을 잘렸다. 부위가 팔꿈치 아래여서 그나마 다행이다. 두 손으로 해도 힘든 설비를 한손으로 하니 일을 주는 사람이 적을 것 같아 우리집 일은 비교적 쉬우니 오라고 했다.
다행히 한 시간 안에 수리를 마치고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데 한 손으로 씻으려니 더러운 게 씻겨나가지 않는다. 내가 비누 거품을 내서 씻어주고 수건으로 닦아주니 예상 밖의 일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손에 화상도 있어 물으니 지난번 일 가서 탔단다. ‘하나밖에 안 남은 손 태워먹지 말고 잘 간수하시라’고 일렀다.
부인도 없이 늙은 엄니와 세 아이를 키웠으니 그가 살아온 삶도 참 팍팍하다. 간식을 들며 두어 시간 자기 신변 얘기를 자분자분 들려주는데, 머리도 못 빗고 세수도 못한 모습에 보기만도 마음이 무거웠지만 핸드폰에 여행가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자기가 좋아하는 ‘사진 찍는 이야기’, 렌즈나 카메라를 샀다는 자랑은 밝은 얼굴로 들려주었다. 한참이나 들어주고 추켜주니 그의 얼굴이 많이 편안해졌다. 자기에게도 뭔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인생의 어려움에서 더 쉽게 일어서게 해 주려니….
얼마 전 법화사 보일러를 해주고 돌아서는데 공양간 보살님이 점심을 먹고 가라 하더란다. 아침도 안 먹었기에 그냥 일어서기 싫었지만 뭔가에 끌려 서둘러 절에서 내려왔단다. 그렇게 내려오다 보니 벼심고 베는 이양기가 논에 전복되어 있고 그 밑에 사람이 깔려 살려달라 하더란다. 이양기를 밀어 사람을 꺼내 주고 112에 신고하여 병원에 입원 후엔 쾌차했단다. 자기로서는 뭔가 이상한 예감에 끌려 움직이는 일이 잦은데 말하자면 ‘신끼’ 같단다. 신령님이 신을 받으라는데 자꾸 피하니까 자신에게 매사가 어긋나는가 보다는 말도 한다. 그 ‘신끼’라는 게 어떻게 인간에게 들어오고 인간을 통해 무엇을 하려고 저리할까?
우리엄마는 신앙이 깊고 심지가 굳은 장로님이어서 옛적에 교회에 ‘마귀 들린’ 사람이 있으면 엄마에게 데려오곤 했다. 엄마는 기도로 그들을 도왔다. 한번은 그런 처녀 하나가 가족에게 칼을 들이대고 해코지를 해서 우리 집에 얼마간 데리고 있었지만 우리 다섯 형제는 그니와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친하게 지냈다. 엄마가 날마다 그 처녀와 기도하고 교회에 데리고 다니던 기억은 나는데 결말이 어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신이든 인성을 파괴하고 삶을 힘겹게 한다면 좋은 귀신은 아닌데….
오늘은 법화사 길을 점심 후에 걸었다. 효소 절식을 시작한지 10일이 되는 날. 오늘에서야 체중이 줄기 시작한다. 몸은 가볍고 걸음은 힘차다. 미루 얘기로는 그동안 몸 안에 쌓였던 독소가 빠져나가서란다. 한목사가 염려하던 ‘치아의 이상’이나 엄엘리가 걱정한 ‘골다공증’ 같은 건 없다.
일 년에 두세 번 효소를 마시며 절식을 하는데 보스코와 같이 산길을 걸어도 배부르게 밥 먹은 보스코보다 절식하는 내 기력이 더 좋다. 보스코더러 함께 절식을 하자고 권하지만 ‘어려서 굶주린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자긴 싫단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될 나이여서 더는 강권 않는다.
인규씨 엄니는 밤늦도록 마른고추를 따고 아들은 고추푸대들을 트럭에 싣는 중이었고, 집에 가보니 그렇게 수확한 고추가 산더미다. 성한 건 다 남이 먹고 저런 찌지레기라야 주인 몫이다. 그 많은 콩타작을 마친 강씨 아저씨는 문상 당산나무 밑에서 늦은 시각까지 메밀을 털고 있다. 정체 모를 그 먼지 더미가 뭐냐고 물으니 알아맞추는 사람은 메밀묵 한 볼테기씩 주겠단다. 이번 병원에 가니 다리는 수술 아닌 시술만 받아도 된다고 그것만으로도 고맙다는 그 집 아짐, 밭농사가 많을수록 골병이 드는 건 언제나 여자다.
집에 돌아와 보니 희정씨가 다녀갔다. 정옥씨가 보낸 고춧가루, 부직포가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고맙고 귀여운 아우님들 그 착한 맘씨를 어찌 다 갚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