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7일 금요일, 맑음

새벽까지 모든 일을 마쳤다 생각했는데 눈뜨자마자 아우성을 듣는다. 고무다라이 속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배추들이 꺼내달라고, 숨죽었다고, 숨막힌다고, 너무 짜다고! 김장은 워낙 ‘추운 날 날잡아서 해야 제맛’이라고들 스스로 위로하지만 오늘, 춥기는 정말 춥다. 다행히 물은 지하수라 날씨에 비해 차라리 따뜻하다.

어린 날 엄마가 채칼도 없어 밤늦게까지 채를 썰고, 우리는 별 요기거리가 없으니 채 썰다 남은 무 조각을 다섯 형제가 돌아가며 다투어 받아먹었다. 배보다 더 맛있던 무 맛. 200여 포기를 하던 엄마의 김장엔 고무장갑도 없이 하루 종일 그 많은 김장을 비비고 나면 엄마는 ‘손에서 불이 난다’며 잠을 못 이루셨는데… 그것도 일종의 화상이어서 들기름도 발라보고 찬물에도 손을 담가보지만 통증은 시간이 가야만 차츰 사라졌다.

엄마는 김장에 꼭 동태를 잘게 잘라 넣었고 대가리와 내장으로는 토장국을 끓여 주셨다. 구수한 그 맛의 추억에 요새도 동태를 사서 국을 끓이지만 옛날 가난한 시절의 맛은 그게 아니었다고 일러준다. 김치와 함께 싸하니 익었던 김치 속 동태! 가끔 효심이 동하여 아버지에게 내가 발견한 공물을 바치고 칭찬도 받았다. 어떤 날은 나도 먹고 싶어 슬쩍 먹으려면 용케도 알아낸 호천이가 ‘누나, 그거 아버지 드려!’라고 밀고하면 ‘불효녀가 되느냐 마느냐?’ 기로에서 동생이 얼마나 미웠던지! 그래서 내가 지금도 김치에 생선을 원 없이 넣나 보다.

11시에 삼천포 일성횟집 언니에게 부탁했던 생 낙지, 생새우, 굴, 갈치, 황석어를 희정씨가 택배 버스에서 찾아 들고 왔다. 일복에 앞치마를 턱 걸치고 우물가 청소와 정리부터 그녀의 활약은 눈부시다. 그녀는 태생부터(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그대로) 특별한 사람이다.

슈퍼에 매어 꼼짝 못하는 친구에게도 ‘당신 몫을 내가 다 할 테니 다리 성할 때 세상구경 다니라!’고 떠밀어 보내고서 ‘주인보다 더 주인다운 역할’을 다 해주고, 연년생 아이들에게 지쳐있는 아우가 죽을 듯 힘들어 할 때는 그 아이들을 한나절이나 맡아줘서 숨통을 티워 주고, 오늘 나처럼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손을 내밀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 제일 궂은 일, 내가 하기 싫은 일부터 척척해낸다. 

그녀는 (우리 빵고 신부의 서품 성구(敍品聖句)처럼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면서’)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려 기다리는 이가 있다는 위안을 주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저런 성품을 지닐 수 있을까 연구대상이다. 주말부부로 남편이 집에 와서 기다린다는데 서두르지도 않는 내공이 부럽다.

배추 크기가 작아 소를 넣는데 시간이 더디고, 쪽수가 많아서 저녁 6시가 넘어서야 일이 끝났다. 뒷설거지를 하고 나니 한밤중. 그니가 가고 나서 그때부터 내 몫. 정리, 청소, 택배 보낼 준비, 양념과 그 냄새로 범벅이 된 옷 빨래와 목욕, 12시가 넘어서야 일이 끝났다.

그러다 보니 내일은 12월 8일, 하나 밖에 없는 울 며늘아가 생일이어서 축하 전화를 했다. 빵기마저 출장 간 집에서 미역국이라도 끓여먹으라니까 ‘그냥 조용히 보내겠어요.’ 란다. ‘우리 며느리는 용각산, 정말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