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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재일기] '한신대학교여동문회'
  • 전순란
  • 등록 2018-12-12 12:04:42
  • 수정 2018-12-12 12: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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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0일 월요일, 맑음




어제 엄엘리가 일손을 거의 다 도와주고 가서 별로 할 게 없을 꺼라고 생각을 했지만 막상 아래층에 내려가보니 오늘 일은 오늘 또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엄마가 집에 오시면 늘 동동거리는 내가 안쓰러워 자주 하시던 말씀. “일 다 하고 죽은 귀신은 없다, 얘! 좀 적당히 해라!” 하지만 그 ‘적당히’가 조정이 안 된다. 


보스코가 나를 도와주겠다기에 당신 편한 대로 하라니까 세팅은 해주고서 번역거리 싸 갖고 도서관에 가겠단다. ‘언니야들 하고 놀자’니까 여자 셋만 되도 그 자리가 벅차다고, 자기는 한 여자로 만족한다고, 사람들이 오기 전에 ‘출애굽’(지금 이름 ‘탈출기’)하겠단다.



윤인선이 시간 계산을 잘못해 한 시간 빨리 왔다고 제일 먼저 들어섰다. 대학 3년 후배로 내가 4학년 때 1학년으로 들어온 친군데 학교 다닐 때는 소리도 없이 무척 얌전했는데 50줄에 들어서며 ‘성음악(聖音樂)’을 시작하여 작사 작곡에 노래까지 날린다. 감춰 두었던 재능이 뒤늦게 빛을 보는 중이다. 


오늘 오는 동문들에게 레크레이션을 지도한다고 램프에 마이크까지 한 짐을 끌고 왔다. 택시에서 내려 두리번거리자 느닷없이 어떤 할머니가 ‘빵기네 집에 왔냐?’고 물으며 데려다 주더란다. 이 골목에 서성거리는 사람은 빵기네 손님으로 여겨지나 보다.





얼마 후 올라온 후배도 택시아저씨가 골목 앞에 내려주며 ‘빵기아빠가 성염인데 뉴스 공장에도 나오고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고, 자기는 이 동네사람’이라며 친절하게 일러주더란다. 성염이 동네에서 그렇게 유명한지 나만 몰랐다. 


예전에는 ‘만년반장 빵기엄마’가 유명하던 때가 있어 한길 버스하차장 앞 과일가게부터 ‘빵기네집이 어디냐?’고 물어 보면 죄다 가르쳐 준다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말람이도 가고 없고, 빵기엄마는 날개 떨어진 새가 됐다.


여동문들이 일정하게 오지는 않고 누구는 일찍 왔다 빨리 가고, 늦게 와서는 빨리가고, 늦게와서는 끝날 때까지 있기도 하고... 여자들이라 확실히 모임도 유연한 것 같다.



오늘 ‘한신대학교 여동문회’ 정기총회(제44회) 예배설교는 퇴임한 여교역자의 쉼터 ‘베다니집’ 원장이며 상담가인 명노선 목사가 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계절인데 비워내야 맞을 자리가 생기는데 내 마음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쓰레기처럼 쌓여 있어 좋은 것을 받아 드릴 자리가 없다고들 한다. 언니 집에 가서 냉장고 청소를 해주는데 날자가 수년이 지나 먹지 못할 음식들이 구석구석 쌓여 있고, 아끼다 먹지 못한 음식들을 쌌던 비닐을 끄집어 내고 보니 비닐만도 큰 통으로 하나 더라....” 딱 내 얘기 같다.


"언니의 그 시절 사람은 모두 배고팠던 한이 있었고, 배고픔도 상처였기에 그것 역시 치유해야 한다고. 나 역시 쓸데없는 것을 목숨 걸고 아끼는데 그런 나를 들여다보면 늘 바닥까지 다 먹어버리지 않고 다음을 위해 아껴 두던 엄마를 보고 자란 나도 아끼고 버리지 못하고... 이걸 어쩌나. 이 상처와 이별을 해야 새로운 것을 받아드리고 화해와 용서가 가능해 진다는데 이 대림절에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냉장고 비우기라도 해야겠다...."



서로들 속속 들이 아는 사이여서 편한 우리들이며 들여다보면 여목사로서든 목사사모로서든 모두 가난한 삶에서도 성실히 살아가고 작은 일에 만족하고 있어 사랑스럽다. 


오후 ‘현장 나눔’ 시간에는 조혜숙 목사의 이주민과 함께하는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참 훌륭한 후배들이 많아 든든하다. '가난한 삶'이 모두의 특징이어서 ‘가난한 사람들과의 삶’으로 목회를 이루어가니 한신다운 얼을 이어가는 자랑스러운 여성들이다.


헤어지며 내년에 다시 우리 집에 오겠다는데, ‘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어쩌냐?’니까 ‘올해 오는 길은 익혔으니 내년에는 잘 찾아올 꺼다.’라는 대답. 상림언니가 80 넘어까지 동문회 모임을 제공했으니 나도 한 10년은 해야 할 듯하다. 



보스코에게 ‘손님들 떠났다’고 문자를 보냈더니 집에 와서는 뒷정리와 다과회 설거지를 마저 해주었다. 여동문 중 내가 신랑 하나는 잘 고른 것 같다.




[필진정보]
전순란 :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하였고,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이다.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부인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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